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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누구? - 황금 코안경을 낀 시체를 둘러싼 기묘한 수수께끼 ㅣ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을 접하고 즐기게 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셜록홈즈와 그의 친구 왓슨'이었다.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늑한 방안에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 심오한 생각을 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있노라면, 어쩐지 셜록홈즈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영국의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신분차별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 숙녀 이런 단어에서 로맨틱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면 나는 아직도 꿈 속에서 산다고 비판받을까. 사실 [시체는 누구?]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도 추리소설이라는 점보다 '귀족'탐정이 등장한다고 해서였다. 표지가 마음에 무척 들었던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팁스라는 건축가의 집 욕조에서 벌거벗은 채 황금 코안경 하나만 걸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책을 사랑하고, 범죄연구와 사건해결이 취미인 덴버 공작가의 둘째 아들 피터 윔지는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수사에 착수한다. 한편 루벤 레비라는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사건이 드러나면서 과연 이 사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지, 아니면 별개의 사건인지에 초점이 모아진다. 도난당한 시체는 없는지, 루벤 레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최근까지 하던 일은 무엇이었는지를 차근차근 조사하던 피터는 어느 순간 사건의 실마리를 알아채고 똑똑하지만 잔인한 범인을 체포하게 된다!
작품은 여느 추리소설이 갖는 구조를 그대로 따라간다. 사건이 일어나고 단서를 따라 경찰과 탐정이 움직여서 끝내는 악당을 붙잡는 과정은 평이하지만, 다른 추리물과는 달리 범인보다 시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더 중점이 놓여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참 매력적이다. 우선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피터. 그는 겉으로는 쾌활하고 명랑해 보이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피곤해지면 전쟁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둠의 그림자는 전혀 느낄 수 없고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 오히려 그에게 딱 맞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피터의 비서겸 집사인 번터. 번터의 말투와 행동을 보고 있으면 왠지 능구렁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주인인 피터의 말을 잘 따르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자신의 주관대로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그 밖에 우직한 경찰인 피터의 친구 파커와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에 알맞은 보상은 그다지 받지 못하는 서그 경위도 이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감초들이다.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 때 이미 도로시 L. 에이어즈는 범인의 심리와 동기를 생각하며 이 작품을 썼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피터 윔지 경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을 비롯해 그 후로 15년 동안 시리즈가 계속 됐다고 하니 그 인기를 가늠해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1913년부터 세계 2차 대전의 초기는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불리는데, 이 작품은 그 시대 가장 빛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셜록홈즈와 그의 친구 왓슨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셜록홈즈보다 말도 많고 행동이 부산한 것 같아도 제 할 일은 착실히 해내는 피터와 그의 성실한 하인 번터, 형사 파커의 매력에서 헤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추리에 약한 나같은 사람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많이 해주는 (범인의 동기라든가 범행방법) 작품이었기 때문에 더 마음에 들었다.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