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키드 1 - 엘파바와 글린다 ㅣ 위키드 6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말이 아닌 제목을 만났을 때, 나는 그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는 경향이 있다. 제목은 책의 내용을 잘 말해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기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키드-wicked. 깔끔한 초록색 표지 위에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마녀가 그려진 것이 내포하는 것처럼 - 사악한, 나쁜, 부도덕한, 버릇이 나쁜, 당치도 않은-등등의 부정적인 의미들이 불룩불룩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맨 마지막 줄에서 찾아낸 -상처가 심한-이라는 의미를 보자, 이 책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뜻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작품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오랜 세월 주위 사람들에게 받은 쌓이고 쌓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간 불행한 서쪽 마녀의 이야기.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유명한 명작 '오즈의 마법사'는 어린 시절 누구나 다 알고 있을 판타지 소설이다. 농장에서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있던 소녀 도로시가 그녀의 개 토토와 함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오즈라는 나라에 도착해, 허수아비, 사자, 나무꾼과 힘을 합쳐 사악한 서쪽마녀를 무찌른다는 줄거리는 권선징악을 대표한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은 어린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유도하는 길잡이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게 한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선하게 묘사되는 동쪽마녀는 정말 착했고, 우리가 사악하다고 믿고 있던 서쪽마녀는 정말 사악하기만 했을까.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악했고, 생애 내내 악행을 일삼다가 마지막에 당연하다는 듯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정말 그렇게 나쁜 마녀였을까. [위키드]는 도로시의 그의 친구들의 관점이 아닌, 서쪽마녀 엘파바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태어날 때부터 초록색 피부에 날카로운 치아를 가지고 있던 엘파바. 목사였던 아버지는 그녀를 죄악의 증거라고 여겼고, 그녀를 낳은 어머니조차 그녀를 괴물이라 불렀다. 엘파바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경로로 세상에 나타난 것 뿐인데. 탄생의 순간부터 주위 사람에게 멸시를 받은 그녀는 시즈 대학교에서 착한마녀로 묘사되는 글린다와 우정을 나눈다. 그녀들이 생활하는 먼치킨랜드는 언어도 구사할 줄 알고, 지적능력을 가진 동물들이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도시였지만 오즈의 마법사가 동물들을 노예로 억압하면서 엘파바와 글린다의 삶의 경로 또한 변화를 맞이한다. 동물들을 위해 지하조직에 가담한 엘파바. 학교 친구였던 피예로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지하조직의 조직원에서 수녀로, 수녀에서 다시 서쪽마녀가 된 엘파바는 동생의 죽음 뒤 마법사에게 대항하던 중 도로시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서쪽마녀를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단순히 악의 전형이라 생각하고 있던 서쪽마녀는 오히려 가슴에 상처와 아픔을 품은, 누구보다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할 줄 아는 인정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가 항상 선했다거나, 희생정신이 투철했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아들 리르에게 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고, 마음 속에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애증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어린시절부터 사랑받지 못한 탓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책의 띠지에는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엎는 이야기-라고 나와있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엘파바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이 책은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엘파바에 관한 심리소설이다.
명작소설과는 달리 허영심 많고, 어쩐지 미덥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글린다의 모습과 엘파바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진정한 선과 악의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고 전해지는, 실상은 다 없어지고 허상만 남은 빈 가죽만을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도로시뿐만 아니라, -상처가 많은-위키드, 서쪽마녀 엘파바도 그녀 자신의 인생에서는 그녀가 주인공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느 책들에게서 배웠듯, 우리 삶은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위키드]를 통해 다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