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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에 사는 사람들 - 무한카논 1부 ㅣ 무한카논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고등학교 때 우연히 비디오로 본 적이 있다. 음악선생님이 구한 테이프를 비디오가 재생하기 시작하고, 나는 곧 화면에 빠져들어갔다. 일본인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풍성한 몸집의 여자가 얼굴에 온통 흰칠을 하고 빨간 입술을 한 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어째서 등에 나비가 안 달렸는데 -나비부인-이라고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가사키에 들어온 미국 군인 핀커튼과 사랑을 하고, 그 사이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얻었지만 핀커튼의 배신으로 주저없이 죽음을 택한 여자. 사랑 없는 삶보다 영원한 안식을 택한 여자. 이 책은 그런 -나비부인-의 사랑의 역사에서 시작된, 오랜 사랑의 기록이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혜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의 무한 카논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무한 카논. 각 성부마다 악곡의 처음으로 돌아와서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는 카논, 즉 돌림노래를 의미한다. 소재를 [나비부인]에서 얻었다고 해서 시리즈의 이름도 참 고상하게 붙였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째서 이 책에 무한 카논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가 된다. 머무르는 시간과 사람은 다르지만, 끝없이 돌고도는 사랑의 이야기들. 한 번 손에 쥐면 놓을 수 없는 영원한 아픔과 신비에 마음이 매료되어 버린다.
'너'라고 시작되는 독특한 도입부. 그 '너'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도키와 (노다) 가오루의 딸 츠바키 후미오다. 소식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온 후미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고모 앙주에 의해 아버지의 역사를 듣게 되지만 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비부인-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비부인과 핀커튼의 사이에서 태어난 벤자민 핀커튼 주니어(JB). 그가 사랑을 통해 낳은 아이 노다 구로도. 그리고 노다 구로도가 사랑을 통해 낳은 아이가 바로 노다 가오루다.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아버지 노다 구로도와 어머니 노다 기리코를 차례로 잃은 소년 가오루는 아버지의 친구인 도키와 시게루에 의해 도키와 가문의 양자가 된다. 마모루의 구박을 견디면서 누나 앙주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가오루는 앙주의 친구 아사카와 후지코에게 사랑을 느끼고 평생 그 사랑을 지켜나가기로 맹세한다.
사랑의 무한카논 시리즈인만큼 등장인물 수도 많고, 그 만큼 많은 사랑이 등장한다. 나비부인의 비극적인 사랑, JB의 사랑, 노다 구로도와 마츠바라 다에코의 가슴 아픈 사랑, 그리고 가오루의 사랑까지. 지금까지 일본 작가들은 연애, 또는 사랑에 관해 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김 빠진 콜라를 마시는 것처럼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사랑의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혜성에 사는 사람들]은 괜히 마음이 설레고, 아파서 책 읽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이 한 권으로 '일본작가들은 사랑이야기를 잘 못써'라는 내 생각을 싹 없애버렸다. 어둡고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이 책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4대에 걸친 소용돌이 같은 사랑. 거기에 세계대전의 역사적 정황까지 곁들여 완벽하게 매료시킨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이야기에 시마다 마사히코의 팬들이 왜 그렇게 설레어 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3부작으로 구성된 무한 카논 시리즈. 그 1권을 접한 지금, 어서어서 다음 권이 나와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1권에서 막 싹트기 시작한 가오루와 후지코의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난 죽어서도 죽지 못할 거야- 라고 외친 가오루. 그의 사랑의 끝이 어떠하든, 무한 카논 시리즈에 한 번 발을 내딛은 사람은 이 주체할 수 없는 매력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