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 -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
이상엽 외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만나고 나면, 내 마음 속에 단어들이 물밀듯이 넘쳐나서 빨리 감상을 적게 만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무 글도 쓰지 않았는데 모든 말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있다. 그럴 때는 어쩐지 그냥 책을 한 번 쓰다듬는 것만으로 그 책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에도 빠진다. 마치 책이 내가 되고 내가 책이 된 듯한 느낌. 혹은 그 책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 같은 느낌. 그래서 그런 책들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내게 [윈난]은 그런 책이다. 

언젠가부터 사진이 가득 실린 여행서적을 즐겨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사진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 많은 책을 접하고, 읽게 되면서 백 마디의 말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이다. 책에 실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어느 새 나도 그 사진의 일부가 되어 있으니까. [윈난]은 나의 그런 욕구를 100% 만족시켜주는 책이었다. 여행 전문가 7인의 조근조근한 서간체의 문장들도 내 마음을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먹먹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득 채워준 것은 윈난의 곳곳을 담은 수많은 사진들이었다. 사진에 관해 문외한이라 해도 좋을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윈난의 사진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된 것은 그 사진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윈난]은 표지부터 독특하다. 쑹짠린 사원이라 불리는 곳을 배경으로 맨 위에 이런 글귀가 보인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자의 낙원-.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했을까. 윈난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곳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생활을 이어가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정겨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다른 이가 적어놓은 글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순수하고 가슴 따뜻한 정을 간직한 곳이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각각의 마을에서 문화와 언어를 지키며 공존하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 모든 색깔을 한 단어로 압축해서 나타낼 수 없기에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여행자의 낙원인가 싶기도 하다. 

사진과 함께 쓰여진 일곱 분들의 마음을 바른 자세로 앉아 깊이깊이 느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해 그리움과 함께 윈난의 풍경에 대한 감탄을 토해내는 편지, 친구 혹은 선배에게, 인연을 맺은 소중한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귀들을 읽으면서 어째서 여행을 떠났는데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비록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는 홀로 훌쩍 사라지고 싶다가도, 좋은 풍경과 가슴 따뜻한 정을 느끼면 내게 소중한 누군가에게도 그것을 맛보게 해주고 싶기 때문인가보다.


 떠나기 전, 방수 재킷 속으로 지갑을 찾는데 내 손을 아주머니께서 꼭 잡더니 그냥 가라며 떠미셨어요. 아니라고 거듭 말을 해봤지만 소용없을 정도로 아주머니는 강경하게 내 등을 떠미셨어요. 결국 따스한 아주머니 손이 떠미는 대로 나는 포석로로 발걸음을 내디뎠어요. 포석로는 여전히 촉촉했고 덩달아 내 마음도 촉촉이 젖어 들었어요. -p183
<아름다운 고원의 아침>편을 쓰신 정일호님의 글귀에서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정은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하다. 아마도 집을 떠나 조금은 외로울 마음을 그 정이 어루만져주기 때문일 것이다. 고성의 변두리에 위치한 재래시장 한 켠 어둑한 벽 아래에서 찍었다는 붉은 꽃의 사진에서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고, 하늘을 닮은 미소를 짓는 소년의 사진이나, 공깃돌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사진은 정일호님의 마음을 적신 아주머니의 정마냥,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누가 우리를 소수라 하는가.
 누가 우리를 소수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충분하다.
그대가 우리를 가난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우리를 초라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소수인 우리는 작은 욕심으로 충만하고
가난한 우리는 맑은 가난으로 아름다우니.

-p205

윈난의 풍경을 보며 팔레스타인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는 자이납에게 편지를 보낸 박노해님의 글속에서도, 그리고 다른 분들의 글 속에서도 윈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윈난은 사람과 자연이 어울려야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발전이 가속화되고, 윈난에서 생산되는 푸얼차가 유명해진다고 해도, 윈난이 본연의 그 소박한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중국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나의 무지함 탓일까. '차마고도'라는 말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 곳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꿈의 도시 '샹그리라' 인 것 같다.
 
문득 책 앞 표지를 보니 <카메라가 쓰는 책.1>이라고 나와 있다. 앞으로 이런 책이 여러 권 나올 가능성이 큰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여행서적은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평화롭게 한다. 다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두 발을 꼭 잡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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