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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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님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고 잠 못 이루었던 밤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때까지 단순히 살인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며 피의자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 죽은 사람은 불쌍한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내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은 가장 사악한 범죄로 치부된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피의자가 되어버린 동기와 과정을 완전히 묵살해 버리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차갑고 잔인한 세상 속을 걷고 있다. 

작품은 시미즈 유이치라는 범인이 잡히면서 시작된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263번 국도의 미쓰세 고개에서 이시바시 요시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만남 사이트에서 알게 된 유이치를 만나러 나가면서 친구들에게는 마스오 게이고를 만나러 나간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수사는 잠시 혼선을 빚게 된다. 게다가 마스오가 며칠 째 행방불명이라는 것을 알아낸 경찰은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한편, 요시노가 만남 사이트에서 만난 여러 명의 남자를 상대로 탐문수사를 펼친다. 유이치는 미쓰요라는 여자와 만나면서 사랑을 느끼지만, 결국 경찰의 추적망에 걸리게 되고, 희생자 요시노의 아버지, 유이치의 할머니, 미쓰요의 일상 등이 펼쳐지면서 사람들의 심리가 낱낱이 파헤쳐진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상당히 불편했다. 제목이 [악인]이기 때문에 으레 그렇듯,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있고 희생당한 사람이 있고, 결국에는 범인이 응징을 당하는 스토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책을 읽고 난 뒤의 기분이 깨끗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대신 답답함만을 남겨놓았다. 정확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인간이 같은 인간의 미래를 짓밟는 행위보다 더한 잔혹함 속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영감이 난데없이 멱살을 잡더니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었어'라면서 달려드는 거야. 야, 열라 심각. 열라 필사적이더만. 하하앗. 와아, 그 영감 얼굴, 진짜 웃기더라.그 왜 마짱이 가끔 흉내내는 영감 표정 알지? -p450

이상하게도 유이치 대신 마스오에게 화가 났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마스오가 아니라 유이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아니라 소설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남의 상처를 헤집으며 웃고 있는 마스오가 너무나 혐오스럽고, 너무나 끔찍해서 눈물이 났다. 인간은 잔인하다. 마음 한 구석에 악한 기운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쉽게 내보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악한 기운은 어느 때, 갑자기, 남의 아픔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고 상처주며 소금까지 뿌린다.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그렇다. 사실 유이치가 사건을 저지르는 데에는 항구에 자기 자식을 버리고 떠난 유이치의 엄마의 탓이 컸다고 생각한다. 유이치가 그의 엄마에 의해 상처받지 않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자신의 상처에 무릎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유이치가, 거짓말을 일삼고 자신을 멸시하는 요시노를 죽인 행위가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요시노는 확실히 허영심에 가득찼고 여러 남자와 사랑없이 가벼운 관계를 가졌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었고, 동료였다. 누군가의 순간의 충동과 다스리지 못한 상처로 인해 숨을 놓아서는 안 되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범죄에만 민감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잔인함 또한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만남사이트가 성행했던 것처럼 간혹 현실의 매스컴에서 비슷한 사건이 비춰지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슬픔 때문에 죽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하니까.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존재. 외로움에 잠겨있던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유이치를 만난 미쓰요와,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상처를 안은 채 자란 유이치가 서로 사랑하게 된 것도 서로의 외로움을 그들만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그 결말이 더욱 마음 아팠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몸을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도 터득해야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책은 처음 접했다. 쏟아지는 일본 문학 속에서 나름대로의 거름장치가 필요했고, 그의 작품은 그 거름장치를 통해 흘러갔다. 하지만 [악인]의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 나는 굉장한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범행만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르는 한 사건을 통해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과 그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완결되었다는 깨끗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중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오래도록 갖게 했다. 아마도 지금 느끼는 혼란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겠지만, 그 때문에 더욱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정말로 괜찮은 작품을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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