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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안토리오 솔레르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인생은 거의 평탄했다. 남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라 부르는 사춘기도, 나에게는 그저 항상 존재하는 공기와 같이 그냥 스쳐 지나갔고, 어렸을 때 자잘한 병치레를 하기는 했지만 큰 병에 걸린 적 없이 건강한 몸으로 살아왔다. 때때로 어려움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세운 목표는 거의 이루었다 생각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내가 청춘이라 생각했던 시기에 내 인생에 불꽃 같다거나, 정열이라거나 그런 단어는 도무지 찾기가 힘들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길은 그저 뚜벅뚜벅 걸어온 느림의 미학을 고수하고 있었지,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용돌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그렇게 불편하고 또 불편했나 보다.
1970년대 여름, 바다가 보이는 스페인의 소도시 영국인 거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신장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미겔리토는 같은 병실을 쓰는 옆 침대 환자에게서 단테의 [신곡]을 선물받는다. 친구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신곡]의 글귀를 외우고, 급기야는 시인이 되기로 마음 먹은 미겔리토. 어느 날 자신만의 베아트리체 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금새 지나가버리는 계절처럼 그 사랑 또한 짧은 끝을 예고한다. 미겔리토의 친구인 바람벽 파코, 멧돼지 아마데오 눈니, 아벨리노 모라타야도 그 스쳐 지나가는듯한 계절 안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사실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한 나에게 <베아트리체>는 그저 예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의 이름이 베아트리체인 줄 알고 있었으니, 책을 펼치고 나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신곡]을 읽고 책을 접한다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미겔리토와 룰리의 사랑은 강렬하다. 하지만 짧다. 짧아서 강렬했던 것인지, 강렬해서 짧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그들의 사랑이 잘 전달되어 오지 않았다. 그들은 젊었음에도 사랑 하나만 보기에는 너무나 현실을 의식했고,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쉽게 흔들렸다.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가녀리게 흔들리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그들이 정말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건지,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었던 감정이 사랑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사람이 느끼는 방법이 제각각이듯,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도 제각각이므로 미겔리토와 룰리의 감정이 사랑이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좀 더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고, 현실의 유혹이 커서 고민은 할지언정 진정으로 서로를 버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의 특징은 비록 미겔리토와 룰리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로 적절히 양념을 잘 했다는 데 있다. 시점은 '나'이지만 나는 책 속에서 그저 이야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점은 마치 신처럼 이곳저곳을 한꺼번에 서술하며 미겔리토 이외의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순간순간 비춘다. 다양한 사람들의 독특한 성격은 읽는 재미를 부가시켰다. 게다가 각각의 청춘들이 고뇌하게 되는 삶과 그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 느낄 수 밖에 없는 성장통은 마치 내가 겪는 이야기처럼 내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찔러왔다. 삶은 어쩌면 항상 폭풍전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조용한 이 인생은 어느 날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한꺼번에 통합되어 언제 커다란 충격에 휩싸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충격은 세상의 주인공이 나뿐이라고 느끼는 청춘의 한가운데 있을 때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어렵고 긴 이름들 때문에 읽는 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지만, 어휘 또한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했다. 나는 아직도 이런 어휘에는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색다른 공간의 청춘들의 아프고 쓰고 달콤한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영화는 책의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언젠가 내 청춘이 그리워질 때 내 과거의 한 부분이 아련해질 때 다시 펼쳐보면, 그 곳에 다른 내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