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서커스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날까. 나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의 어떤 표정이 떠오른다. 직접 서커스를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 본 TV 안에서(명절 프로였는지, 혹은 영화였는지) 광대는 한 순간 어딘가 애처로운 눈빛을 한 채,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관객을 웃겨야 할 광대가 보여준 바람같은 표정. 금방 얼굴을 바꾸어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이 어린 내 마음에도 아프게 와 박혔던 기억이 난다. 그 때부터 서커스는 나에게 단순히 구경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이만큼 자란 지금도 명절 때가 되면 가끔 TV에서 서커스를 본다. 서커스를 보되 서커스를 보지 않는다. 현란한 묘기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몸동작을 해내는 그들을 본다. 그들의 삶을 본다. 

 제이콥은 수의과에 다니던 대학생이었지만,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빈털털이로 반 정신을 잃은 채 한 기차에 올라탄다.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 기차에.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막일을 하던 제이콥은 전속 수의사로 서커스단에 머물게 되고, 아름다운 말레나에게 점점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었다. 오거스트라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괴팍한 남편이. 어느 날 서커스단에 로지라는 코끼리가 들어온다. 오거스트가 코끼리의 훈련을 맡아 호되게 때리는 것과는 반대로, 제이콥은 사랑으로 코끼리를 보살핀다. 이미 제이콥에게 있어 코끼리 로지는 가족과 같다. 오거스트의 폭행을 계기로 폭발한 제이콥은 말레나와 도망칠 계획을 세우지만, 공연 중 동물들이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제이콥이 평생을 숨겨야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코끼리에게 물을]은 서커스라는 작은 사회의 화려한 조명 뒤에 감추어진 이면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하마가 죽었을 때 엉클 앨이 어떻게 한 줄 알아? 수조에 물 대신 포름알데히드를 채워넣고 계속 동물원에 세워놨어. 우리는 이 주 동안 하마 피클을 기차에 싣고 다녔지. 이 모든 게 다 눈속임이야., 제이콥.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냐. 사람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니까. 사람들은 우리한테 눈속임을 원해. 그게 눈속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p178
제이콥이 서커스단에 들어갔을 때 오거스트가 해 준 이 이야기는 그 단적인 예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묘기를 펼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하고 있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에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우리가 서커스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의 즐거움, 내가 해내지 못하는 경지에 다른 사람이 도달해 있다는 경이로움,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일어나는 격앙된 분위기. 그러나 우리 삶 속에서 서커스는 단번에 잊혀지고, 뒤에 남는 것은 또 다시 어디론가 옮겨 가야 하는 그들의 허탈함 뿐인 듯 하다. 공연하고 이동하는 반복적인 삶. 더구나 그 안에서조차 계급에 의한 차별이 존재하니, 책의 내용을 되뇌어 볼 수록 어쩐지 자꾸만 마음이 아프다. 물론 이 책의 내용처럼 모든 서커스단이 그러하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만약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관객의 입장에서만 그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삶은 동시에 처절하고 아름답다. 마치 서커스처럼..>이라는 구절이 자꾸 내 마음을 때린다. 겉으로 내보이기 위한 화려함을 위해 인생에 얼마만큼의 인내와 끈기와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1시간 여의 멋진 공연을 위해 어릴 때부터 수많은 시간을 훈련으로 보냈을 서커스 단원들처럼. 그리고 젊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제이콥의 인생처럼.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인생들처럼.
 
93세의 제이콥과 젊은 시절의 제이콥이 번갈아가며 서술되는 책은 대단히 흥미롭다. 손에서 책을 떼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마치 거대한 성의 축조에서부터 허물어지기까지의 한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젊은 시절의 제이콥과 나이를 먹어 뻔뻔해지고, 능글맞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커스를 사랑하는 늙은 제이콥이 여기에 있다. 여기저기 옮겨다녀야만 했기에 서커스단에서 식량과 물은 항상 부족했다. 동물들에게, 코끼리에게 물이 필요했듯이, 늙은 제이콥에게도 물이 필요했다. 서커스라는 활기찬 물이. 코끼리 로지는 곧 제이콥이었고, 제이콥은 곧 로지였음을 책장을 덮은 지금에서야 알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