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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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규칙을 깨는 여성들] 


여자의 몸이지만 시신들의 검험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한성부 수사파 아란을 주인공으로 하여 조선시대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 [한성부, 달 밝은 밤에]의 작가 김이삭. 이번에는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로 또 한번 만나게 되었습니다. 괴담집, 이라고 할지 옛날 이야기라고 할지 망설여지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여성들을 내세워 이야기 속에 잠식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자랑합니다.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에 시달리던 여성이 이른바 '미친XX' 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똑같이 미친 여자가 될 각오까지 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성주단지>, 괴담의 중심 광명고 학생들의 괴담기를 그린 <야자 중 XX 금지>, 여섯 남편을 잃은 과부 옹녀와 늑대인간 변강쇠의 이야기를 다룬 <낭인전>, 기억을 잃은 할머니가 절대 잊지 못하는 과거와 맞물려 진행되는 현재의 속죄 <풀각시>, 서학 신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숨긴 비밀 <교우촌> 까지 한편 한편 기대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이었어요. 독특한 것은 어딘가 오싹하기도 한데, 그 오싹함이 끝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정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섯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 어떤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아마 이 작품집이 단순히 괴담, 호러나 미스터리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이야기의 방향은 조금 달라졌을 거에요. 주인공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거나 실종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상처를 껴안은 채 살아남았다는 찝찝한 결말을 맞이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조금 달라요. 어찌됐든 자기 앞에 닥친 위기를 뛰어넘기 위해 귀신과의 만남도 주저하지 않으니까요. 누군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딘가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기 위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그 결과까지 책임지려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여성들을 지키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존재들이 그들이 속해있던 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세계라고 할 수도 있는 곳의 존재라는 것에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럼에도 새로운 접점을 가진 존재가 또 우리 삶에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호기심. '괴력난신'으로도 불리는 그 새로운 존재들이 그녀들의 세상에서는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세상에서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가의 말 중 '부디 우리의 삶에 깃든 공포가 언제나 안전하기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어쩌면 작품 속 여성들의 결말이 그러했던 것은 작가의 바람이 담겼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오싹함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특별한 다정함을 함께 맛볼 수 있었던 작품들.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다려봅니다!!

** 출판사 <래빗홀>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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