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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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귓가에 울리는 소리없는 절규!!]

 

매 시즌마다 하나의 주제 아래 다섯 권씩 출간되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의 주제는 '결정적 한 순간'인데요, 저는 [악의 길]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부터 이 작품은 어쩌면 시즌 3의 주제인 <질투와 복수>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남자의 열정으로 시작된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여자의 배신과 그에 따른 질투와 복수가 담겨 있어 한편의 스릴러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결정적 한 순간'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며 읽는 과정 속에서 인간을 광기의 길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인지 혹은 운명인 것인지 등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이끈 그 한순간은 대체 언제였을까요.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요"

"무엇 때문에?"

"당신 때문이죠, 멍청이!"

 

이것이 씨앗이었다.

p 46

 

가난하고 다소 거칠지만 성실한 일꾼인 피에트로 베누는 니콜라 노이나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처럼 가진 것은 없으나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인 사비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니콜라의 딸인 마리아가 자신 때문에 사비나를 질투한다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려요. 사비나에게 불타올랐던 마음은 한순간에 사그라져 마리아를 향합니다. 그리고 저는 피에트로가 '악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결정적 한 순간을 바로 이 장면으로 꼽았어요. 피에트로를 그리 격정적으로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마리아의 아름다운 외모? 자신을 밀어내는 주인집 딸을 향한 오기? 원인이 무엇이었든, 저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피에트로는 주인집 딸인 마리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하인의 구애에 질색하던 마리아였지만 남자로부터 그런 열정적인 마음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새 피에트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고뇌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되어 결국 피에트로를 배신하고 오래 전부터 자신을 마음에 둔 프란체스코와의 결혼을 선택하죠.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한때는 격하게 입맞춤을 나누었던 남자가 감옥에 있게 되었는데도 마리아는 자신의 안전한 결혼식을 위해 피에트로가 조금 더 수감생활을 하게 되길 바라기까지 해요. 결국 그녀는 피에트로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 밀회를 즐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결혼은 돈 많고 안정적인 남자와 하고 싶었고요. 이리 보면 마리아의 모습은 지금 현대인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리아의 배신으로 결국 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 피에트로. 하지만 진정한 '악의 길'은 바로 마리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피에트로가 저지른 악행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끝내 외면하다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두려워해요. 마리아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작품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저는 왠지 이 두 사람이 끝없는 절망과 두려움의 나락에서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결혼 생활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여성 작가로서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라치아 델레다. 특히 [악의 길]은 사르데냐 섬의 독특한 풍경과 문화가 녹아들어 있어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한층 현실감있게 다가옵니다. 읽는 동안 어쩐지 뭉크의 <절규>가 떠올랐던 작품. 어쩌면 마리아와 피에트로의 내면도 이렇게 절규로 가득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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