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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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감각의 작품들]

 

절친한 사이인 키라와 에바. 소녀들은 손바닥을 그어 새어나오는 피를 새하얀 우유가 가득 담긴 그릇에 떨어뜨린다. 핏방울이 퍼져나가 작고 붉은 꽃들을 피워내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소녀들의 모습은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우유와 피를 섞은 후 마침내 둘이 번갈아 액체를 나눠마시는 모습에는 소녀들의 일탈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짜릿함과 역겨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기분'을 공유한 두 사람의 세게는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다소 충격적인 결말과 몽환적인 색채를 선보이는 표제작 <우유, 피, 열>은 같은 감정을 공유한 소녀들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녀들의 심리가 알 듯 모를 듯 다가오는데, 이상하게 그것이 섬뜩하거나 더럽다는 생각이 들기는 커녕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반짝이는 유리처럼 느껴졌다. 표면적으로는 비극처럼 여겨질 한 소녀의 죽음은, 어쩌면 그것이 그 아이가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복잡한 심경을 남긴 채 한 동안 머리속을 맴돌았다.

 

총 열한 편의 소설은 붉으면서도 하얀 색감, 끈적끈적한 촉감, 오묘한 냄새 등을 동반한 채 시종일관 독자를 따라다닌다.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한 여인들의 이야기는 이해가 가는 것도 있고, 도통 모르겠는 것도 있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감정이입해서 읽은 이야기는 <향연>이었다. 배아가 태아가 되었음을 확인해야 마땅한 그 날, 레이나는 아기를 잃는다. 그 고통이 너무나 커서 모든 것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사랑하는 히스와 전부인의 딸에게마저 미움을 느꼈다. 하지만 히스는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짐작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히 언제쯤이나 되어야 '흘려보낼 수 있는지' 그녀를 다그치므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같은 여자인 나 또한 여성들의 심리라면 고개를 내젓는 마당에. 내가 레이나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 또한 아기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들었던 심장 소리가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그 진공 같은 상태의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 그런 경험은 실제로 겪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각각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대체 이 작가는 그 동안 어떤 일을 겪어왔을까, 무슨 일을 겪어왔을까.

 

미국 내 유수의 매체로부터 열띤 찬사를 들으며 떠오르는 신인 작가. 그녀가 처음으로 내보인 이 원색적이고 태고의 본능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들은 분명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과연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출판사 <모모>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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