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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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기억과 떠오르는 기억 사이, 사랑이 있었다] 

 

가오리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이즈미에게 엄마 유리코가 치매에 걸렸다는 현실이 닥쳐옵니다. 똑같은 물건을 몇 개씩이나 사들이고, 이즈미에게 몇 번이나 전화하고, 가오리의 이름을 헷갈리는 엄마의 주요 치매 증상은 집 밖을 나가 배회하는 것. 혼자 몸으로 이즈미를 낳고 키워온 유리코는 어린 시절 이즈미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던 것을, 사실은 이즈미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던 것을 기억하고 정처 없이 아들을 찾아 헤맵니다. 엄마의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옅어져 가지만 유리코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이즈미의 기억은 잊어버리고 싶었으나 잊지 못했던, 혹은 정말로 잊고 있었던 시간들과 함께 선명해지기 시작해요. 

 

가족 중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누구니?’라고 묻는 장면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제 치매는 인간에게 너무나 흔한 질병이 되었고, 치매를 앓게 된 가족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왔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상상하는 그런 장면을 실제로 맞닥뜨린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지, 그것만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을 상정해보는 것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나에게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리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인 것도 맞지만 저는 이 소설은 유리코의, 어쩌면 자식이었다가 부모가 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연을 끊은 뒤 홀몸으로 이즈미를 낳아 키워온 유리커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부부 둘이 함께하는 육아도 힘겨운데 혼자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해서 생계를 꾸리는 유리코에게 ‘자신의 삶’이란 꿈과도 같았을 거예요. 아이가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부모인 우리는 알잖아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자신보다 아이가 우선시되는 사랑을요. 

 

그런 유리코와 이즈미 사이에는 언급하기 어려운 ‘1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그 때’를 계기로 이즈미는 된장국을 싫어하게 되었고, 모자 사이는 더 이상 예전같을 수 없었죠. 그 때 유리코의 마음이 이해되어서 저는 너무 슬펐어요. 엄마였으나 한 여성이었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너무나 갈구했지만 결국 그 때의 선택조차 죄책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일생에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병이 진행되고 잠이 많아진 그녀는 꿈 속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 때’가 지난 후 새로 이사한 집에서 함께 절반의 불꽃을 보았던 모자. 아마 그 때 유리코는 다짐했을 겁니다. 아들과 함께 한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자고, 이제 정말로 아들만을 위해 살겠다고. 모든 기억을 자신 안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다가 그 기억을 이즈미에게 전달하는 유리코. 작가는 ‘과연 기억을 잃은 사람이 그 자신일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고, 저도 예전이라면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했겠지만, 유리코와 이즈미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곁에서 기억을 이어나가주는 사람이 있다면, 설사 내가 기억을 잃어도 나는 그대로의 나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리코의 기억은 이제 이즈미를 거쳐 그의 아이에게로 전달되어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읽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짬 내서 읽다가 울컥 눈물이 나서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가와무라 겐키의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도 좋았지만 이 [백화]는 특히 더 좋네요. 이 작품을 기반으로 감독 및 각본까지 맡아 영화로도 제작했다니, 그 감성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이 겨울에 만날 수 있는 절반 불꽃, 불꽃에 담긴 유리코의 마음이 여러분에게도 전달되기를요.

 

** 출판사 <소미미디어>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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