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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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라고 하면 훈민정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그가 다스리던 조선은 어쩐지 평화롭고 백성들이 살기 좋았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 문화적인 면에서 찬란한 업적을 자랑하는 그 시대에도 당연히 왜구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한 싸움이 있었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4군 6진을 개척하기 위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한 가지 내가 몰랐던 것은 명나라에 금과 은 뿐만 아니라 처녀까지 조공했었다는 것. 고려 시대 원나라에 보내졌던 공녀나 병자호란 후 끌려갔다 돌아왔던 환향녀 뿐만 아니라 세종 때에도 공녀가 존재했었다니, 그것도 태종 때보다 늘어 74명이나 명나라에 보내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기록만으로도 74명이라면 기록되지 않고 끌려간 여인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작가 허주은의 손에서 탄생된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1426년 조선, 제주를 배경으로 열세 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건을 수사하는 민환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뛰어난 종사관이었던 아버지가 소녀들이 사라지는 사건을 수사하던 도중 실종되자 그 흔적을 따라 제주로 온 소녀 민환이. 신병이 들어 제주의 무당인 노경 심방에게 맡겨진 채 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생 매월과의 관계는 냉랭하기 그지없고, 복선이라는 낯선 여인으로부터 전해받은 아버지의 불탄 일지만으로 벌어진 일을 모두 알아내기에 앞길은 너무나 막막하다. 게다가 조선의 여인이라는 신분,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고 시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라 일컬어지는 여인의 몸으로 과연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댕기 머리 탐정'은 진실을 알아내는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므로, 아직은 아버지의 죽음을 믿을 수 없으므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럽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 싶은 마음과 함께 또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부딪혀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그럼에도 페이지를 넘기는 손은 바삐 움직이고, 결국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결코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11세~18세의 어린 나이로 명나라에 끌려가야 했던 소녀들, 공녀로 선발되지 않기 위해 얼굴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여인들,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짐승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부모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과연 누구인지, 누구를 원망해야 한스러운 삶을 버틸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이상하지예? 어멍 아방은 자식 위한거랜 생각허지만 정작 자식 입장에선 원허지 않는 일을 할 때가 하영(많이) 있주마씀.

p365

 

제주를 배경으로 한만큼 제주도 방언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주석이 달려 있기도 하지만 문장 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고, 오히려 작품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던 듯 하다. 아름다우면서도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숲을 묘사한 부분과 제주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웠을 정경들이 마음에 와 박혀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바람에 휩쓸리는 듯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에서 자라고 생활해 영어로 글을 쓴 작가. 요즘은 외국에 있는 한국인 작가가 영어로 쓴 책을 번역하는 게 유행인가, 종종 이런 작품을 만나곤 한다. 국내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네들의 눈에는 보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어느새 네 번째 작품을 집필 중이고 이 작품은 두 번째 작품이라는데, '댕기 머리 탐정' 민환이의 활약을 계속 보고 싶다.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에 자매의 갈등이 풀어져가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었던 작품. 사실 읽기 전에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스토리의 전개와 구성, 인물들의 사연조차도 억지스럽지 않아 무척 만족스럽게 읽었다. 기회가 된다면 허주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은 바람이다!

 

** 출판사 <미디어창비>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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