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과 분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80
윌리엄 포크너 지음, 윤교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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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같은 언어 속에서 피어나는 격동의 가문 이야기] 

 

지금까지 화자의 시점은 말 그대로 그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물의 느낌이나 기분, 의견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윌리엄 포크너의 [고함과 분노]를 읽다보면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정신상태까지도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적 장애를 가진 벤지의 시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혼자만의 문제에 갇힌 퀜틴의 괴로움과 혼란스러운 상태, 제임스의 냉소적이고 신랄하며 몰인정한 모습들이 작가가 고안해낸 문체 안에서 선명하게 느껴진다. 

 

몰락해 가는 미국 남부의 명문가 콤슨 가문. 반항적인 데다 성적으로도 자유분방한 장녀 캐디와 그런 캐디에게 뒤틀린 애정을 느끼는 퀜틴, 오직 돈에 대한 집착만이 삶의 목표인 제임스, 지적 장애를 가진 막내 벤지. 어쩐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 설명에 무척 기대하며 펼친 첫 부분에서부터 머리가 띵-해왔다. 벤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1부는 과거와 현재를 너무나 자유롭게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 속에서조차 앞뒤가 무질서하게 진열된다. 아무리 벤지의 시점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하며 퀜틴의 장으로 넘어갔을 때도 입이 떡 벌어졌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퀜틴임에도 난해하게 다가오는 그의 사고들. 세 번째 장인 제임스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에야 어째서 작가가 이런 기법들을 사용했는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작가가 다른 이들처럼 평범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했더라면 벤지와 퀜틴의 이야기가 그리 생동감있게 다가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다. 냄새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벤지는 거세라는 비인간적인 처사까지 당하고 제임스로부터 매번 정신병원에 보내버려야 한다는 언어 폭력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는 상태다.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장남 퀜틴이나 사생아 딸로 인해 결혼이 파탄난 후 그 딸마저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캐티, 억압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연인과 도주하는 모습을 보이는 캐티의 딸, 가족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결국에는 돈에만 집착해가는 제임스 모두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런 몰락해가는 가문 속에서 어지간하면 보기 싫은 인물을 꼽지 않으려 했으나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자 미운 캐릭터는 이들의 엄마였다. 벤지의 시각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그를 돌보는 러스터가 벤지에게 '그만 징징대'라는 말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 말을 이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나쁜 것은 다 남편을 닮고 좋은 것은 자신을 닮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캐티와 퀜틴은 콤슨 가문으로, 오직 제임스만 자신의 친정인 배스콤 가문의 일원이라며 추켜세우는 모습이나 생활에 밝지 못한 모습 등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녀 때문에 제임스의 인생이 더 망가져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몰락에 그녀가 일조한 점이 적지 않다. 

 

[고함과 분노]라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맥베스>의 맥베스가 뱉은 독백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인생은 바보 천치가 고함치고 화를 내면서 떠들어대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울부짖으며 생을 마감한 맥베스. 제목 덕분인지 작품을 읽는 내내 인물들의 외침이나 격한 감정들이 그대로 전달되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삶은 이토록 어렵고 가혹한 것인가.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읽다보면 이상하게 마법처럼 그 어려운 문장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이 강해졌던 작품.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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