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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속 세계사 -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최안나 옮김 / 시공사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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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은 한통의 편지가 저를 울립니다.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가 만든 죽음의 수용소에서 체코인 수용자 빌마 그륀발트가 남편 쿠르트 그륀발트에게 보낸 편지였는데요, 빌마와 쿠르트, 그들의 두 아이 존과 프랭크는 다른 유대인 가족들처럼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어요. 분류 과정에서 다리를 저는 존은 즉시 처형을 뜻하는 왼쪽으로 보내지고, 빌마는 차마 아들을 혼자 보낼 수 없어 존과 함께 하기를 선택합니다. 빌마는 다른 가족과 분리된 즉시 메모를 써서 감독관에게 건네면서 의사로 일할 남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죠. 그 후 빌마와 존은 바로 가스실로 들어가고, 빌마가 건넨 이 메모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쿠르트에게 전달됩니다. 이 편지를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에 기증한 사람은 두 사람의 살아남은 아들 프랭크였어요.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아요. 당신, 사랑하는 나의 하나뿐인 당신, 부디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스스로를 비난하지 마세요. 이건 우리의 운명이에요.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예요. 건강하게 지내고,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는 아니라도 부분적으로는 나아질 거라는 내 말을 기억하세요.
p 91
편지의 전문을 인용할 수는 없지만, 빌마의 편지에는 남은 가족을 향한 애정과 애틋함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남편인 쿠르트가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성숙함과 남은 프랭크를 잘 보살펴달라는 어머니로서의 부탁이 담긴 편지를 읽다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이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혼자 죽음을 맞을 수도 있었던 존과 함께 하기를 선택한 그녀의 모성애가 심금을 울리는데요, 아마 저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에 몇 번이나 편지를 읽으면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우편함 속 세계사]에는 총 129통의 편지가 실려 있어요. 빌마의 편지처럼 일반 사람들의 편지는 물론, 정치적, 역사적, 문학적으로 세계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의 편지도 있어 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부터 시작해서 미국, 아프리카, 인도,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 전통, 국가, 인종을 아우르는 편지들이 모여 있어요. 예카테리나 대제가 포툠킨과 나눴다는 편지에는 애정 뿐만 아니라 문화와 정치에 대한 논쟁까지 담겨 있었다고 하니, 그 한통 한통의 편지가 더욱 소중히 느껴집니다.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보냈던 편지, 마하트마 간디가 히틀러를 친구라 부르며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는 편지, 스탈린이 심복들에게 보낸 편지,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시작 당시 보냈던 편지, 어떤 여배우가 70세 쯔음 드디어 다리를 자르게 됐다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시니컬하면서도 묘한 분위기의 편지까지, 이 모든 편지들을 읽다보니 수백, 수천의 시간이 제 몸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현대는 문자와 채팅의 시대죠. 과연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이 더욱 내밀하게 느껴져요.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가슴이 두근거리는 얕은 긴장감을 동반한 채 책에 파묻혀 있었던 시간. 신혼 초에는 옆지기에게 곧잘 편지도 쓰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통화와 문자로 대신했던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옆지기 생일도 다가오는만큼 심도 있는 편지를 작성해볼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생일에도 꼭꼭 카드를 남겨야겠어요.
** 네이버 독서카페 '책과 콩나무'를 통해 <시공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