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 아킬레우스의 노예가 된 왕비
팻 바커 지음, 고유라 옮김 / 비에이블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역사를 이어가는 것은 다름아닌 여성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이 받은 영예로운 상을 앗아갈 권리를 갖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소유가 아니죠. 그가 쟁취한 게 아닙니다.

p150-151

수많은 작품에서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은 남성들이다. 여신의 아들인 빛나는 아킬레우스와 그의 친구이자 연인으로 묘사되는 파트로클로스, 욕심과 욕망의 화신인 아가멤논,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참 뒤에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와 그리스의 적으로 그려지는 헥토르와 헬레네를 유혹한 파리스 등. 그 어디에서도 여성의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접했던 이야기들 속에서 중심은 대부분 아킬레우스. 그가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가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에서의 주인공은 (처음으로!)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그가 전투의 보상으로 받은 브리세이스다. 그리스의 침략으로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을 잃고, 남동생을 죽인 남자와 매일밤 잠자리를 같이 해야 했던 여자.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는 보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다. 잘 싸웠으니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영예. 브리세이스가 바다 냄새와 소금기로 어머니 테티스를 연상시키지 않았다면 매일 밤 그녀를 찾았을지도 미지수다. 덕분에 그녀는 사제의 딸인 크리세이스 대신 아가멤논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그것'이라 불리며 모욕당한다. 그것. 사람이 아닌 물건. 전쟁에서 앞으로 나서서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남자들이지만, 그 상처는 고스란히 여성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고 아버지와 아들들, 남자 형제들을 죽인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술을 따르는 여자들. 혹시라도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아들을 갖길 원하는 여자들. 당연하게도 저주는 여자들의 마음 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크리세이스를 찾으러 온 그녀의 아버지의 저주가 브리세이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이제 그것은 주문처럼 그녀의 입속에서 굴러간다.

은제 활의 신이시여, 멀리서 화살을 쏴도 명중시키는 신이시여, 쥐의 복수를......

사제이자 아버지인 남자의 저주와 여성들의 분노를 접목시킨 작가의 안목이 놀랍다. 비록 사제일지라도 그 강력한 역병이 비단 한 명의 아버지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신화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남자들에게 가려졌던 여성의 목소리가 거대한 천둥처럼 울려퍼지는 것 같다.

 

그 수모를 당하고도 파트로클로스보다도, 아킬레우스보다도 살아남은 브리세이스. 이제 그녀는 한 명의 여성이 아니라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강인해질 것이다. 그러고보면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 대부분 남자일지라도 그 역사를 이어갔던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상흔을 입고도 살아남아 생명을 잉태하고 미래라는 시간으로 걸어가는 여성들. 침묵으로 지켜온 여성들의 희생과 아픔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 네이버 독서카페 '책과 콩나무'를 통해 <비에이블>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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