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ㅣ 뒤란에서 소설 읽기 1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0년 12월
평점 :

그 일은 어쩌면 레이먼드의 삶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친한 친구인 안드레가 전학을 가고 난 다음, 밀리가 소년의 삶에 등장한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같은 건물에 살지만 그 때까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두 사람이 몇 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나누는 친밀하고 깊이 있는 시간들에 대해서.
새아버지와 엄마, 배다른 동생 세 명과 함께 생활하는 레이먼드. 가족들 중에서 자신만 피부색이 달랐기 때문일까. 또래 소년들과는 달리 유독 생각이 깊은 그 앞에, 앞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 밀리가 등장한다. 함께 사는 건물 2층에서 밀리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도와주러 방문하던 루이스 벨레즈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자, 그를 아냐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것. 심성이 고운 레이먼드는 밀리를 지나치지 못하고 그렇게 그들의 특별한 우정이 시작된다.
밀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녀에 대해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되는 레이먼드. 함께 마트에 가거나 은행에 다니면서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는 밀리의 이야기에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켜보고자 노력한다. 일단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습관을 고치는 것부터 출발! 그리고 시작된 '루이스 벨레즈 찾기 프로젝트'. 소심하고 예민했던 레이먼드가 밀리를 위해 한집 한집 방문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 누군가는 행운을 빌어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레이먼드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찾게 된 루이스 벨레즈.
이야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가 레이먼드와 밀리의 만남-정서적 교감-루이스 벨레즈 찾기로 구성되어 있다면,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된 레이먼드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들은 백인이고, 그 때문에 저절로 뒤따르는 많은 특권들을 누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게 특권이란 걸 자신들은 모르지. 왜냐하면 특권을 누리지 않은 날이 그들 삶에는 없었거든. 그들한테 상대의 인종에 따라 다르게 처신하는지 물어봐. 그럼 아니라고 대답해.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은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건 마치 물고기한테 물에 관해 묻는 것하고 같은 거야. 물고기는 물에 둘러싸여 있어. 매 순간 그 속에서 헤엄치지. 하지만 물고기는 이렇게 말할걸. '물이라뇨? 당신이 말하는 물이란 뭔가요?' 아주 종종 그게 진실이야.
p140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루이스 벨레즈를 통해, 레이먼드는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편견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레이먼드도, 독자인 나도 루이스 벨레즈를 살해한 그가 '정의로운' 법의 심판을 받게 되기를 원하지만 글쎄,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게다가 그의 죽음 때문에 또다시 과거의 망령과 조우하게 된 밀리의 상심은 너무나 크다.
그런 밀리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다름아닌 레이먼드다. 처음에는 밀리로부터 조언과 격려를 받기만 했던 레이먼드지만, 그 우정으로 한층 성장하게 된 그는 이제 밀리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애정은 있었지만 평소 대화가 적었던 친아빠와 속을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이라니!! 보는 내가 흐뭇해서 레이먼드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었을 정도였다.
이런 우정이, 이런 사람들의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에 가슴 벅찬 경이로움을 느낀다. 삶은 어느 때 우리를 속이는 것 같고, 세상은 가끔 도저히 뛰어넘지 못할 시련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이고 어떤 '멋진 일'이라는 것에 기쁨을 느꼈던 작품. 이 겨울,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만났다.
** 출판사 <뒤란>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