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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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늘 누가 있고, 늘 텔레비전이랑 라디오가 켜져 있어서 아주 시끄러워. 천사가 지나갈 시간이 없어."

"좋잖아. 늘 가족한테 둘러싸여 있다니."

"안 좋아. 우리 집은 천사가 지나갈 수 없는 집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그렇게?"

"혼자가 되고 싶어."

p272

 

혼자가 되고 싶어, 혼자 있고 싶다. 요즘 제 머리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고 초조해요. 원인은 알고 있지만 약해지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머리속은 안개가 낀 듯 뿌옇고, 생각 하나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 간절하게 혼자 있고 싶다는 저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코로나의 여파로 아이들은 등원하는 날보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네요. 으힛. 가끔은 아이들이 부르는 끊임없는 '엄마' 소리에 한숨이 나올 때도 있지만, 이 집이 '천사가 지나갈 시간'이 있는 집이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독살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그만큼 절실하게 혼자이고 싶었던 거겠죠.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까요. 

 

15년만에 개정판으로 찾아온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는 호쿠리쿠 지방 K시에서 벌어진 독살 사건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열일곱 명이나 희생되고 오직 두 사람만 살아남은 잔혹한 범죄. 그 중 한 명은 사건이 발생했던 저택의 장녀 아이자와 히사코입니다. 결국 범인은 유서를 써놓은 채 자살하지만, 작품의 초반에서부터 히사코를 향한 의심스러운 분위기가 피어오르죠.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이 소녀만이 그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장면은 어느 새 과거로 흘러가고, 그날로부터 20여년 뒤 사이가 마키코가 당시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합니다. [잊혀진 축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책. [유지니아]에는 그 책의 작가와 편집자, 담당 형사, 독을 마시고 생존한 가정부, 범인을 따랐던 동네 아이, 이제는 중년이 된 히사코의 증언이 잇달아 등장하며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진범은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

 

한때 온다 리쿠의 작품이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던 저에게 [유지니아]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어요.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탐색해야 했던 지난 날이 떠올랐습니다. 현재까지 그녀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 제가 어째서 개정 전 [유지니아]를 읽지 않았던가-하는 것은 제게도 큰 의문이지만, 덕분에 지금 이렇게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 오히려 기쁘기까지 합니다. 한폭의 그림이 떠오르는 듯한 섬세한 작품. 그 안에서 인간의 바랄 수 없는 욕망과, 해서는 안 되는 죄악과, 인생의 허무함들이 꽃처럼 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과거의 흔적들을 따라가는 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들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목이 메었다가 끝내는 맥이 탁 풀렸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시간이었건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찬란했던 과거의 추억들만 빛을 발하는 초라한 현실. 그 안에 갇혀 이제는 스러져 간 사람들의 추억과 죄의 무게만 짊어진 채 남은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그녀가 참으로 가엾게 느껴졌어요. 그녀는 철저히 '혼자'가 된 것입니다. 자신이 원했던대로, 그러나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읽는 내내 작품의 배경이 된 날씨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 했습니다. 살인적인 무더위, 줄줄 흘러내리는 땀, 숨통을 죄어오는 듯한 햇빛. 그럼에도 작품의 배경이 된 이시카와 현의 가나자와 시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요. 온다 리쿠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기억이 될만한 작품 [유지니아]. 이 작품을 저의 2천번째 리뷰로 남겨둘 수 있어 행복합니다. 먼 훗날, 아련한 추억에 잠겨 다시 이 작품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설레입니다.

 

**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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