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나기라 유 지음, 김선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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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미래를 전부 리셋해준다면 소혹성이든 뭐든 떨어지면 좋겠다. 출구 없는 미래를 통째로 쾅 하고 단번에 전부 날려주면 좋겠다. 그렇게 이따금 울화통이 터지는 건 나뿐일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빛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을까?

p46

 

평범한 세상 속에서 바랐던 지구 멸망. 누구라도 좋으니 이 세계를 확 무너뜨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지. 내가 운 좋은 생활을 해왔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온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하물며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지금은 더욱. 이 아이들의 다음 아이들까지는 몰라도 부디 나의 아이들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무탈한 세상이기를, 기후 변화로 인한 천재지변 따위도 최대한 늦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그런데 나름 소박한 행복 속에 살고 있는 지금, 소행성과의 충돌로 한달 후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제일 처음 무엇을 생각할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바라고 싶은 일은 무엇이려나.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에서는 지구 멸망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네 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줄곧 괴롭힘을 당해온 탓에 좋아하는 여자아이 앞에 용기내어 나서보지 못했지만 마지막 한 달을 남겨놓고 성장하는 유키, 폭력의 굴레 속에서 빛도 희망도 없는 삶을 살았으나 우연히 알게 된 아이의 존재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 신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좋아하는 남자까지 버리고 악착같이 살아야 했던 시즈카, 그리고  꿈꾸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가수가 되어야 했던 미치코. 여전히 지구가 멸망하고 자신들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겹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을 살아내야했기에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던 사람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이면 죽는 이 마당에,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곱씹고 있다. 이런 막바지에,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p202

 

지구 멸망에 관한 뉴스를 들은 뒤 각자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두고 네 명의 등장인물들은 생각한다. 왜 하필 지금인 거냐고, 마지막을 앞에 두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 그토록 원할 때는 주지 않았던 행복을, 신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끝이 보일 때에야 선심쓰듯 내려주셨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운 일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마지막이었기에 가능했고 손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멸망'이라는 키워드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평생 손에 넣지 못했을 가능성, 진실, 그리고 행복. 늘 꿈꾸었던 것들을 모르고 오래 사는 편이 나았을까, 아니면 짧더라도 강렬한 행복 속에 죽는 게 나을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마지막까지도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멸망'이라는 소재로 짐작할 수 있는 과도한 슬픔의 감정은,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만약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야기였다면 오히려 경망스럽게 느껴졌을지도. 그저 무겁고 묵묵하게, 가슴을 짓눌러올 뿐이다. 그 안에서 순수하게 올라오는 희망이 있다. 부디 지구 멸망이라는 것이 무언가의 착각이었기를, 이들이 멸망의 기운을 가슴에 품고 소중하게 찾아낸 것들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을 내 것으로 만들면서 생각해본다. 멸망이 오기 전에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겨보자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데에 쓰자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꿈꾸며 노래했던 미치코처럼. 이 책의 제목이 어째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인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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