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에센셜_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실린 작품 중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이야기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모든 것은 '나다(무(無))'이면서 '나다'이고 또 '나다'와 '나다'이면서 '나다'일 뿐이지.
[디 에셀셜_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밝은 곳> p4
저 '나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도 독자 개인의 몫일 듯 한데, 일단 나는 이 '나다'의 개념을 '허무'보다 '그저 담담히 세상 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에서도 이 '나다'의 분위기가 짙게 느껴진 것은 노인의 태도 때문이었다. 고기 잡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수확이 없어도 낙담하지 않는 덤덤한 태도. 누구나 그를 측은하게 여기고, 함께 고기를 잡았던 소년의 부모는 노인을 '재수 없는 자'라며 업신여기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늘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다. 조바심이나 분노, 슬픔과 외로움 등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는 대신 어쩐지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것은 포기와는 다른 것.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자신은 주어진 일을 다 할 뿐이라는 태도마저 엿보이는 듯 하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최대의 행운, 바로 큰 물고기다. 혼자서는 제대로 감당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물고기와의 사투.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한판 대결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볼 것이다. 노인이 혹시나 죽지는 않을까, 어떤 불운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예상대로 비록 노인은 생명을 잃지는 않았으나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큰 고기를 집까지 가져가기에는, 노인은 너무 멀리 와 버린 탓이다. 그가 그 고기를 잃을 때의 심정이 세세하게 묘사된 것은 아니지만 단 한 문장으로 그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는 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p 101
큰 고기를 잡았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온 그의 모습을 '허무'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겠다. 처음 떠날 때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올 때도 비어 있는 노인의 손.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모르겠으나, 세상 큰 고기를 손에 넣었다가 잃게 된 그의 마음은 말 그대로 '허무'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 허무에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은 패배했으나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인간으로서의 긍지. 폭풍과도 같았던 시간은 지나고 이제 그의 앞에는 고요한 일상이 다시 자리잡을 것이다. 그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어렸을 때 읽은 [노인과 바다]는, 내 기억 속에 노인이 물고기를 잡았다가 놓쳤다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 때는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작품이냐고 의문을 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역시 대가의 작품이란 이런 것인가. 7월에 두 번째, 이번을 계기로 세 번째 읽고 나니 문장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항상 노인을 지지해주고 위로해주는 소년. 소년이 없었다면 노인은 그토록 힘을 낼 수 있었을까. 인간이 순간순간마다 망가지거나 패배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지탱해주는 단 한 조각의 햇살일지도 모른다.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독자들에게 저마다의 교훈을 이끌어낸다는 [노인과 바다].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나다'가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