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결말이 쓰여 있습니다.

이 작품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줄 알았던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에게 슬쩍 기대보려다 원래의 연인에게 돌아가는 이야기'. 요는, 여주인공 나스쩬까가 나쁜 여자라는 것이다. 고독한 몽상가인 '나'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죄가 아니나, 유약한 그의 마음을 이용해 배신당-했다고 생각한-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했던 것.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인지 연민인지 우정인지 애매모호한 단어들을 쏟아내며 '나'를 뒤흔들어놓은 것. '나'를 선택하겠다고 하면서, 배신한 줄 알았던 남자가 돌아오자 단번에 그에게 돌아가버렸다. 아니 그러면서 키스는 왜 하냐고, 왜!! 이런 어이없는 여자를 보았나!!

 

[벨낀 이야기]를 읽고 러시아 문학에 도전해도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시작한 [백야].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라는 시적인 문구에 홀랑 반해, 이것은 분명 대작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몽상가인 '나' 덕분인지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듯한 문장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나'가 운하의 난간에 기댄 채 서 있던 나스쩬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옳거니! 이제부터 시작이렷다! 생각하고 책을 고쳐잡았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전개에 울분만 치솟고 만다. '나'의 마음이 어떤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를 쥐락펴락 농락한 나스쩬까. 결국 '나'는 나스쩬까에게 어장관리만 당하고 만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장황한 문장과 과장된 감정 표현들이었다. 순수한 독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맞다. 잔혹하게 배신당했으나 '나'가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하지만 어떤 감정이라도 자꾸 말로 표현하거나 과장되게 드러내려고 하면 그 깊이는 오히려 얕아지고 마는 법. 나스쩬까와 '나'에게는 분명 애절한 연심이었을텐데도, 나는 이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보였다. 서정적으로 다가오기보다 '이 둘 왜 이리 시끄러워! 그만 좀 이야기해!'라고 버럭 하고 싶었을 정도였다고 하면 이해가 되시려나.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는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이미 읽었던 작품도 달리 보이고, 읽지 않은 작품들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에 읽는 과정 자체가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이 [백야]에서 턱 막히는 느낌이다. 이것은 아마도 독자와 작품의 합이 맞지 않는 경우일텐데, 이 경우에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좋았던 것은 딱 하나. 첫문장. 크. 첫문장은 진짜 좋았는데, 딱 내 취향이었는데. 가만. 혹시 내가 순수함을 잃은 건가. 내가 너무 세상에 찌든 것인가. 그렇다 해도 나스쩬까가 나쁜 여자라는 의견은 굽히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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