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품위있고 교양있게 살아온 이반 일리치.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부인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것은 어쩌면 인생에 있어 누구나에게 항상 일어나는 상황. 결혼생활에서 갈등을 겪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이들 부부에게 애정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반 일리치는 그런 문제에 집중하는 대신 자신의 일과 친구들과의 소소한 만남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나날 중, 승진과 함께 봉급이 올라 새집을 준비하게 된 이반 일리치. 집 장만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손수 커튼을 달다가 떨어져 옆구리를 부딪힌다. 그렇게 찾아온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고, 결국 그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간다.
한 인간의 죽음이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이란, 상상 외로 얼마나 미미한가.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들었음에도 그의 친구들은 슬픔을 느끼기보다 앞으로 그가 있던 직위에 누가 앉을 것인가, 이 일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은 사람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비단 그의 친구들에게만 한정된 감정과 사고는 아닌 것으로, 이반 일리치의 부인인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마저도 그의 죽음으로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이 얼마나 되는지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반 일리치의 추도식에서 사람들이 보였던 눈물과 흐느낌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었을까.
옆구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아 이런 의사, 저런 의사를 만나보지만 별 차도는 보이지 않고, 결국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반 일리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으로 가족들조차 그런 그의 공포와 아픔에 진심으로 귀기울여주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의 표면적인 위로와 위선으로 보이는 염려 뿐. 생생하게 다가오는 두려움 속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하인 게라심. 그가 보여주는 순수한 배려와 온기는 이반 일리치의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에 한 가닥 빛이 되어주며, 결국 자신이 바랐던 것은 그런 진심어린 걱정과 배려였음을 깨닫는다. 순간,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휘말리고,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있어 진실한 기쁨은 무엇이었는지, 자신의 길은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못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과연 나는 잘 살아오고 있는가, 나의 삶은 진실한 것이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후회일까, 충만함일까.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이반 일리치를 괴롭혔던 공포의 실체는 무엇인가. 살아있는 내내 죽음에 대한 공포로 고통스러워했던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야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며 안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은 병이 아니라,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독자들에게 죽음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그저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 충실할 것을 충고하는 듯 하다.
삶과 사랑, 죽음에 있어 항상 깊은 울림을 주는 똘스또이의 걸작.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인간의 생생한 내면 묘사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다. 살짝 신경쓰인 것은 이름의 표기. 아무래도 똘스또이보다는 '톨스토이'가 더 익숙한 것은 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