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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읽은 줄 알았으나 읽지 않았던 작품들이 존재한다. 그 이름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히 읽었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처음 보는 장면이 등장할 때의 기분이란! 두둥!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도 그러했다. 일상생활에서도 평소와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지킬 박사와 하이드도 아니고 저렇게 돌변하다니!' 와 같은 말을 농담처럼 던지기도 하고, 머리속으로 생각도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작품도 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저 캐릭터에만 국한되어 있었을 뿐, 작품 자체는 처음 읽는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쩐지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하다고 여긴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생명의 유래를 밝혀내기 위해 생리학과 해부학에 몰두한 빅터가 인위적으로 생명이 있는 존재를 만들어냈다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지킬 박사가 자신 안에 자리잡은 이중성을 감지하고 스스로 제조한 약물을 마시면서 별개의 사악한 존재를 내보였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금 실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창조하기 위해 연구하고 실험하고 결국 성공(그것을 성공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면)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더불어 그런 과정에서 불어오는 음습한 분위기와 기운까지.
하이드는 유희에 지나치게 탐닉한 지킬의 모든 욕망과 악함을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지킬이 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 이를테면 길에서 마주친 소녀를 짓밟고 지나가거나 누군가를 살해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을 실행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이드의 외모가 추악하고 괴상하게 그려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킬도 처음에는 그런 하이드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분출시킬 수 있다는 것을 탈출구로 여기며 즐겼지만, 악은 점차 본래의 지킬마저 잠식해나간다. 한몸에 공생하는 지킬과 하이드의 비율이, 처음에는 지킬에게 지분이 많았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이드가 점차 그 몸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하이드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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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는 지킬의 욕망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의 욕망의 결과를 암시하는 듯 하다. 조금만, 아주 살짝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조절할 수 있어, 내가 원할 때는 금방 빠져나올 수 있어-하는 자기암시에 걸려 어느덧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영원히 가라앉게 되고 마는 것.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욕망과 자만을 조심하라고. 아차싶었을 때는 이미 늦은 거라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1886년에 출간되었다가 반년 만에 4만 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01년까지 미국에서만 25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그 기록이 어마어마하다. 극장용으로 영화화된 것만 123편이 있다고 하며, 연극이나 뮤지컬, TV나 라디오 드라마 등 기타 매체로 각색된 수 또한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책 중 하나라니, 언젠가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볼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그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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