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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를 쫓아다닌 지 벌써 20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 전부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어도, 이상하게 이 작가에게는 떨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저는 특히 그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소설은 머리를 감싸쥐며 행간의 의미, 이미지 등을 파악하면서 읽으려고 노력하게 되지만, 에세이는 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읽게 되거든요. 여기에 맥주와 약간의 안주, 그리고 기분 좋은 음악이 있으면 금상첨화죠! 봄에 읽어도, 여름에 읽어도, 가을에 읽어도, 겨울에 읽어도 좋은 하루키의 에세이. 이번에는 '티셔츠'에 관한 이야기네요.
소올직히 다른 사람이 '티셔츠'와 관계된 에세이를 냈다면 '무슨 이런 책이 있나' 싶었을텐데 하루키가 썼다니, 그가 소장한 티셔츠를 구경할 수 있다니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것도 덕후의 덕질 중 하나려나요. '어느 새 이런저런 물건이 '모이는'것이 내 인생의 모티프 같다'고 한 하루키. 다 듣지 못할 양의 LP, 다시 읽을 일 없을 책, 잡지 스크랩, 그리고 연필깎이에 끼우지도 못할만큼 짧아진 연필-앞의 세 가지는 몰라도 연필깎이에 끼우지도 못할 연필이라니요??!!-. 이제 그 수집목록에 티셔츠도 포함된 것 같습니다.
티셔츠 종류도 많을 뿐더러 장르(?) 별로 모아놓은 티셔츠를 보니 역시나, 와하하! 또 웃음이 빵 터집니다. 서핑과 관련된 티셔츠, 햄버거와 관련된 티셔츠, 술을 애정하는 그인만큼 위스키와 관련된 티셔츠도 빠질 수 없죠. 전 술을 잘 못마시는데 술에 대해 묘사하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이 자꾸 마시고 싶어져요. 참으로 감칠나게 묘사하는 위스키 마시는 법. 위스키를 따르고 동량의 물을 따르고, 잔을 휘이 돌려서 섞으면 되는 이 간단한 방법조차도 그의 글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듯 화려해보여요. 아마 술에 대해 언급하는 하루키의 눈도 반짝 빛날 것 같지 않나요.
엄훠! 세상에나! 하루키 자신과 관련된 티셔츠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책이 출판되면 홍보를 위해 티셔츠나 토트백, 모자 같은 굿즈를 만드는 모양인데, 'Haruki Murakami'라고 쓰인 티셔츠를 그가 입는다고 생각하니 왜 이리 재미진가요! 여기에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빠지면 안되겠죠. 독서와 관계 있는 티셔츠도 물론 있었습니다.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파웰스 북스' 티셔츠와 어떻게 생긴 독서클럽인지도 모를 'AHS 문예클럽' 티셔츠, 호놀룰루 도서관의 '해마다 열리는 북세일' 티셔츠, 그리고 시애틀의 유명한 독립서점 '엘리엇 베이북 컴퍼니'에서 낭독회를 하고 받은 티셔츠 등.
저도 한때 책 이외에도 물건을 꽤 모았습니다. 관람한 영화티켓과 포스터, 영화와 책관련 엽서, 어디 다녀온 곳과 관련된 팜플렛으로 제 방과 책상 서랍이 가득 차 있었죠. 제 방이 좀 더 컸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전 여전히 그 물건들과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물건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니까요. 하나의 물건에 깃든 여러 가지 추억들을 생각하면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 자체가 저의 시간들을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뭘 모으냐고요? 책과, 그리고 아이들과 관계된 모든 것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루키가 모은 티셔츠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앞으로의 저는 물건을 버리기가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옆지기나 친정어머니가 들으시면 깜짝 놀라시려나요.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