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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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항상 자신이다. 나를 중심으로 관계가 엮이고 그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현실에서든 문학 속에서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녹턴]에서는 그 '당연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일지라도 주인공은 '나'가 아니라 대부분 다른 누군가였다. 한때 유명했던 가수, 관광지를 찾아온 커플, 함께 공연했던 동료. 그나마 자신이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단편에서도 그 행동의 주체는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입을 빌려 듣는 타인과의 이야기. '나'라는 필터를 거쳐 전해지는 음악과 관련된 다섯 편의 이야기는, 그래서 담담하게 느껴지지만 어쩐지 그래서 더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우리 삶에 있어서 극적인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의 시간은 먹고 자고 일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아무 일 없는 듯 그렇게 흘러간다. 무심한 듯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사진처럼 찰칵 찍어 간직하고픈 순간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마치 그런 인생의 사진기같다. 평범했던 날들에 일어난 크고도 작은 일들.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는 날들을 포착해서 글로 남겨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에 둔 날,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일으킨 날,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슬픔이 남겨진 날, 먼 훗날 돌이켜보면서 위안이 될만한 그런 날들. 그런 에피소드들이 사진처럼 가슴에 스며들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표제작인 <녹턴>. 음악적인 재능은 갖췄을지 몰라도 외모 면에서 부족한 음악가가, 아내의 불륜상대로부터 수술비를 지원받아 성형수술을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의 옆방에는 한때 유명 가수의 아내였던 린디가 역시 수술을 받고 투숙한다. 한밤중 그들에게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사건. 어이없고 황당하며 의미를 두기에 따라서는 금방 잊혀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만약 이 단편의 후속작품이 나온다면 이 두 사람이 어느 날 밤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두고 미소짓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훗날 꿈처럼 일어났던 그 때의 일을 두고 회상하면서 추억에 잠기고 잠시나마 위로받는 것. 인생의 묘미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는 이 작품을 그저 밋밋하다고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작품의 소재로 쓰이기는 했지만 크게 보면 그리 엄청난 사건들은 아니며, 설사 기억할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인생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대단할 것 없는 삶.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런 시간 속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엉뚱한 일들을 겪으면서. 그런 의미에서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나타낸 서정적인 피아노곡'이라는 뜻의 '녹턴'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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