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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 행복서사의 붕괴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평점 :
<사무사 책방 시리즈>에는 유독 도정일 작가님의 책이 많다. 총 일곱 권 중 세 권이니 거의 절반에 이르는 셈. 같은 작가님의 책을 연달아 읽으면 이런 저런 내용들이 합쳐져 조금 혼란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함께 읽다보니 작가님이 추구하는 방향, 말하고자 하는 맥락들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용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나에게는 조금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어쩌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항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받아들이며 살아오고 있었기에 책을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 이런 기분이었다고 할까.
인간 문명의 어제와 오늘을 성찰하는 글들로 채워진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는 우선 '행복 서사의 붕괴'부터 이야기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행복 서사의 또 다른 형식으로서의 공주 설화를 설명하는 글이다. 공주 설화의 주인공인 공주는 말만 주인공이지 사실은 추구주체(남성)가 획득하려는 대상에 지나지 않고, 신분변화와 지위 상승이 주요 모티프이다. 당장 우리 주위에 흘러넘치는 대중문화만 봐도 공주설화의 공식, 구조와 주제를 무한반복한다. 또한 공주 설화는 '행복'의 상품화를 통해 결핍감과 충족 욕망을 생산하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지금 시대를 지배하는 일반 생산 양식과 소비양식에 순응하는 가장 충직한 주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규정하고 '너는 그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라고 부추기며 '이 행복을 획득하지 못하면 안된다'고 강압하는 세력. 저자는 이것을 행복의 이데올로기, 자본 아비라 부르면서 공주 설화를 비롯한 역사의 설화화가 경쟁적 욕망 충족을 향한 지배적 형식이 되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이 형식의 이데올로기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것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므로.
인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과 미래, 종교와 과학, 다음 세대를 위한 인간의 문명에 대한 책임, 인간의 감정에까지도 서술해내는 작가의 글은 따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 개개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 하면서도 읽고 있다보면 세계와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작가님의 관심은 아이들에게도 향하는데 특히 아이들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 부분도 인상적이었고, '한국에서 가장 심하게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입니다'라는 문장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아이들은 시험 성적 때문에 시달리지 않을 권리, 살인적 경쟁환경에 내몰리지 않을 권리, 공부 못한다고 '왕따'당하다가 "엄마 아빠 미안해요"라며 유서 써놓고 자살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놀고 숨 쉴 권리, 성장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 그들이 자라는 데 필요한 환경과 시설을 누릴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아이들은 망가지고 개어지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p 280
아이들 또한 행복 서사, 공주 설화의 이데올로기의 강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위의 공주설화의 공식에 맞춰보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성공한다, 너는 공부를 잘 할 수 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고 제대로 살 수 없다'가 되는데, 소름 끼칠 정도로 딱 들어맞지 않은가. 어떤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알고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는 이 사회를 살아갈 다음 세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눈 부릅뜨고 머리 감싸안은 채 읽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글을 읽었을 것인가 싶다. 아이들 키우고 시간에 쫓겨 그저 살아가기에 바빴던 시간 속에서, 양식 있는 글을 읽었다는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