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 채광석 서간집
채광석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평점 :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한 저자는 1974년 오둘둘 사건(5월 22일 서울대에서 긴급조치9호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학생시위)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했다. 영등포 구치소를 시작으로 1977년 6월까지 공주교도에서 수감생활을 한 저자의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는 그와 그의 사랑 정숙씨가 나눈 서신 중 저자의 편지만 모아 출간한 것이다. '녹슨 쇠창살을 뚫고 캄캄한 독재의 하늘 위로 폭죽처럼 쏘아올린 청춘의 화양연화'라는 멋진 홍보문구도 좋았지만, 직접 접한 그의 문장들 속에서 어떻게든 한 시대를 살아내려는 청춘의 몸부림을 보았다.
가장 아름답고 착한 것이 가장 더럽게 썩을 수도 있다는 경구는, 우리들 개개인에게 스스로를 새롭게 하기 위해 매 순간마다 자기를 반성하고 깨우쳐가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처음은 그저 담담했다. 묵묵히 견디자고, 오히려 정숙씨를 위로하는 듯한 문장들과 위기를 기회로 삼으면서 스스로에게 내면의 성찰을 촉구하는 듯한 내용에 감탄했다. 2년 6개월, 말이 2년 6개월이지 새파란 청춘이 작은 방에 갇혀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럼에도 그의 깨끗한 내면이 보이는 듯한 맑고 담백한 문장들에서 격동의 시대 속 그가 있는 곳만이 순수의 향기가 풍겨나오는 것만 같았다.
참다운 삶, 참다운 깨달음은 언제나 인간을 그의 무거운 타성과 대결하게 만들고 다시 고쳐 배우게 하고 종래의 안일한 생각들이나 의견들을 지양하게 한다. 인간은 위기의 강압을 통해서만 참다운 앎과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담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던 그도, 책의 중반부에 가서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면의 괴로움을 편지를 통해 정숙씨에게 털어놓고 또 후회하고, 자유를 갈망하면서 소소한 일상을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오갔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 자신은 괴로웠을지언정, 나는 괴로움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저자를 보면서 오히려 진실성을 느꼈다. 극한의 고통에 내몰린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참된 깨달음 같은 것, 그가 내뱉는 말이 절대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런 시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문학은 글깨나 읽을 줄 아는 지식층 독자를 대상으로 전개되는 글놀음이거나, 문학사적 위치나 정신의 정상을 자랑하는 위대성의 표시이기를 그치고 하잘것없는 서민 대중의 고달픈 삶에 하나의 위안이 되고 그들의 매몰된 삶에 사람다움의 본질을 일켜 세우는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감 생활을 통해 더욱 자신을 갈고 닦은 저자의, 감히 내가 명문장이라 꼽는 부분이다. 사회의 엘리트였음에도 사회의 부조리함에 결코 눈감지 않고, 더불어 찾아온 고통 앞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다짐하는 이 문장들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그의 정신을 본다.
괴로웠던 시간을 모두 흘려보내고 마침내 정숙씨를 만나게 되는 날을 맞이한 저자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을지. 지면에서조차 햇살같은 그의 마음이 흘러나온다. 1979년 결혼해서 1981년 조금 전에는 아들의 돌을 기념한 저자가, 당연히 지금도 생존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198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작가소개란을 보고 마음이 쿵 떨어졌다.
담장 밖을 넘어 교환한 사랑의 기록이자 시대의 기록인 이 책이 어째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지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 사내의 성찰과 고뇌, 고통과 사랑의 기억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멋진 그림들과 글귀가 어우러져 마음을 충만하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