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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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범위를 누구로부터 누구까지 정해야 할까. '전통적인' 의미를 갖는 가족의 범위가 달라진 것은 이미 한참이다. 혈연으로 맺어져 있으나 가족이라 부르지 못할 만한 관계도 있고,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이라 부르기에 모자라지 않은 경우도 있다. 기쁜 일 뿐만 아니라 슬픔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가,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 곁을 지킬 용기가 있는가, 나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가족을 정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가정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더구나, 친부모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이 잔인한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사람들이 '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지문]에 등장하는 오기현에게 일어난 그런 일은, 그녀의 아버지가 사실은 친부가 아니라 의붓아버지였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 아닐까. 아무리 잔혹한 세상이라도 '어떻게 친부가, 어떻게 친엄마가!' 라며 여전히 충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우리는 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인면수심의 일을 자행하는 것이 납득된다는 것은 아니다. '짐승의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아까울 정도의 그런 일은, 미치지 않고서야 저지를 수 없는 것이므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남은 기현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언니에게 털어놓은 얼마 뒤 시체로 발견된다.

 

 

시종일관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이 작품은 경악할만한 인간의 잔인함을 묘사하는 부분에서조차 냉정하다. 그저 덤덤하게, 이런 일이 있고 저런 일이 있다고 서술하는 듯한 분위기. 작가님, 어떻게 이렇게 쓰실 수 있나요. 그조차도 모호하게,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전개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냉정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의현처럼.

 

 

결국 이 작품의 키워드는 '가족'이다. 가족이기에 믿었고 가족이기에 지켜야 했던 존재들. 가족이기에 나의 상처에 공감하고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존재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과 분노. 그것은 어쩌면 가족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잘했다고 칭찬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난할수만은 없었던 이야기.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몸이 불편한 사람의 노동력 착취 등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마음과 몸이 고통스러운 일들이 이 한 작품 속에 담겨 있다. 외면하고 싶다. 하지만 외면해버리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쁜놈들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서, 언젠가 내 가족이 아파하면 진심으로 같이 아파해주자고, 누군가가 더러운 일을 당하면 나서서 손 내밀어주자고,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용기를 끌어올려본다. 꽃새미 화원의 이웃들처럼, 그런 비겁한 사람은 되지 말자고.

 

 

리뷰 쓰기 힘든 장르, 그리고 리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는 종류의 책이다. 누군가는 지금도 당하고 있을 고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조차 위선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책.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질식사한 아이의 부모가 올린 청원글, 대학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글에 동의하고 왔더니 기분이 좋지 않다. 글이 잘 적히지 않는 것은 그 때문으로 돌리고 싶다. 세상에는 마음 아픈 일들이, 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미안한 일들이 너무 많다.

 

 

**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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