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출간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으로 일약 스타가 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평소 그녀는 "나 혼자 있고 싶어요. 홀로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삶이 주는 상처에 대한 면역력이 약합니다."라며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확보할수록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믿은 작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았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세상에 있어서의 작가 역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원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사회민주당의 조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반동분자로 불리면서 원색적인 비난까지 받았으나, 후에 사회민주당이 비사회주의 정당들의 연합 정권에서 밀려났을 때도 담담하게 입장을 밝힌 후 작가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스웨덴에서 체벌 금지와 부모 폭력 금지 법안이 공포될 수 있도록 호소했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동물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근간을 마련한 '린드그렌 법' 제정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몽고메리 버스에서 백인에게 양보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의 일화는 유명하다. 아이들이 읽는 인물 이야기에도 등장할 정도다. 흑인에 대한 차별 및 부당 행위를 참지 않고 '악법 폐지야말로 세상을 가장 빨리 도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로자 파크스는, 버스 분리 탑승 제도를 하루 빨리 폐지시키기 위해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고 수모를 당하지만, 그녀는 결국 1956년 12월 21일 흑백 통합 버스 제도를 이끌어냈다.
"햇빛 아래에서 꼼짝 않고 무기력하게 하품이나" 하면서 살지 않기로 다짐한 오리아나 팔라치. 그녀는 특정 권력 혹은 권력자들이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도록, 그리고 함부로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며 언론인의 책무라는 사명을 가지고 목숨을 건 글들을 발표한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는 판화를 통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형상화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인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임무라고 받아들였던 케테 콜비츠. 그리고 위인전에서만 읽었던 나이팅게일과 헬렌 켈러까지.
이들 여성들의 공통분모는 '전문' 정치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자신들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를 깊이 고민했던 여성들. 물론 '정치가'라는 직함을 달고 활약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여성들은 자신들이 했던 그 모든 일이 결국에는 '정치'라는 길로 이어지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 불의를 참지 않는 것. 아픔을 딛고 서서 한걸음이라도 발자국을 떼는 것. 사람답게 사는 길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여성들이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를 통해 여성에게 있어 글쓰기와 독서, 사유가 어떤 의미인지를 짚어나갔던 장영은님의 [여성, 정치를 하다]는, 21명의 여성들을 통해 '왜 한 여성이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정치에 뛰어들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보게 한다. 왜 여성인가. '페미니즘'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내세우지 않아도 '여성'에 주목하는 일은, 남성 정치가가 이루러낸 일들에 대해 감탄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성'과 '정치'라는 단어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릴 다수의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정치가인 남성이 이룩한 쾌거들에 대한 기록도 기꺼이 읽고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어쩌면 그런 책들은 별다른 홍보 없이도 쉽게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다. 제목에 굳이 '남성'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 사소한 차이가 바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언젠가는 '여성' 이 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이룩한 일들로 평가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멸시받고 비난받았음에도 '쓰레기처럼 살지 않기 위해'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 출판사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