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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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누의 작품 독자 간담회에 모습을 드러낸 니노. 오랜만에 만난 니노를 보며 레누는 여전히 그를 향한 욕망을 키워간다.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련된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는 니노지만, 내 눈에는 시대를 주도해나가는 지성인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의 힘든 고비에서 모든 것을 내팽개쳐버리고 떠나버린 비겁한 남자로만 비춰질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누와 릴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인 잠자리 부분에 있어서도 릴라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인다. 릴라가 니노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레누의 오랜 사랑의 시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릴라가 조금 얄미워보였는데, 이번에는 레누가 뻔뻔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레누는 릴라를 정말 친구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누군가를 진정 친구라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면, 누군가가 내 앞에서 그 친구의 치부를 자꾸 들춰내려고 할 때 레누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 레누와 릴라는 서로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보낸다. 릴라는 스테파노와 카라치 부인이라는 부와 명예를 모두 내려놓고, 아들 리노와 엔초와 또 다른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벌기 위해 리노를 하루종일 누군가에게 맡겨 놓은 채 브루노가 운영하는 햄 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한다. 열악한 환경에 시시때때로 여자 노동자들의 엉덩이나 가슴을 노리는 남자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공장에서의 릴라의 위치는 고독하고 힘들다. 엔초와의 관계도 기본적인 애정은 존재하지만 여느 커플들같은 육체관계는 힘든 릴라. 그녀에게 섹스는 쾌락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공포와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누구보다 뛰어났던 자신의 모습은 커녕, 현재의 생활에서 꿈이나 희망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견디고 버틸 뿐. 그런 시간들이 릴라 자신에게 '경계의 해체'를 가져온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맞이해 레누에게 도움을 요청한 릴라. 항상 자신을 지켜봐 달라고, 레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안심이 될 거라고 응석을 부리는 릴라의 말에 그녀가 지금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 지 가늠할 수 있었다. 릴라가 그 때까지 괴로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적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 '너는 나의 눈부신 친구'라고 이야기한 것 외에는 한 번도 없었다. 늘 고통을 레누를 향한 비난과 조롱으로 내뱉었던 릴라였기에, 나는 혹시나 이쯤에서 릴라가 정신이라도 놓아버릴까 걱정했다. 그런 릴라를 레누는 기꺼이 돕고자 한다. 결혼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될 이름, '아이로타' 가문을 이용해서라도. 하지만 레누에게 그런 도움을 받은 것이 영 자존심을 상하게 했는지 릴라는 또 한 번 레누에게 상처를 입히고, 갈리아니 선생님과의 재회로 릴라에 대한 열등감을 다시 인식하게 된 레누는 무척 고통스러워하며 결혼을 위해 나폴리를 떠난다.

 

 

엄청난 삶, 나폴리에 남은 다른 누군가보다는 뛰어난 삶을 원했던 레누를 시련으로 이끈 것은 결혼과 출산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레누는, 곧 자신의 글을 원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무엇이든 써보려고 하지만 두 번째 책을 내기 위해 쓴 글은 시어머니로부터 비판을 받은 채 잊혀져 갔다. 결국 집안일과 육아에 전념하며 평온을 얻으려 노력하는 레누를 보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 휘몰아치고 있을 바람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그녀를 이해하기가 쉬웠다고 할까. 아이를 돌보느라 일과 중에는 글쓰기와 독서에 집중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레누는 '이러려고 그렇게 공부했었나' 하는 자괴감에 휩싸인다. 이제는 나폴리에 남아 새로운 직장을 얻고 돈도 많이 벌며 자유로운 삶을 찾은 릴라와 자신을 비교하며,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레누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이번에도, 니노다. 불같은 사랑은 아니더라도 교수이자 연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남편, 피에트로. 삶과 현실이 가져다주는 고통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생활의 지난함이 주는 다툼과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누도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므로 조바심을 갖지 않고 육아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했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니면 레누에게 니노라는 이름은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일까.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사랑이라 해도 니노와의 관계를 위해 아이들까지 버리고 떠나는 레누의 모습에 공감은 하지 못하겠다. 다만, 니노로 인해 레누 앞에 어떤 가시밭길이 펼쳐질 지 짐작이 되는 바, 그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울 뿐이다. 그와의 관계가, 엄마로서의 책임과 아이들을 향한 의무를 벗어던질만큼 그리 대단한가. 두 곰돌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도오저히! 이해가 안 된다. 후반부는 정신차리라는 말만 백번은 하면서 읽은 듯!

 

 

파시스트와 사회주의 당원들의 대립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이고 격동의 시간을 드러낸 3부.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을 읽을수록 그녀의 글에 빨려들어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금만 읽어야지, 하고 시작하다보면 어느 새 책을 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 이제 <나폴리 4부작>도 단 한 권만 남은 상태.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레누를 향한 릴라의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기대? 그 기대에서 비롯된 질투? 4부에서는 부디 이들의 감정이 단정히 정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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