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살의 - JM북스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손지상 옮김 / 제우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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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은 유리 같아.
분명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이지 않아. 19년이 흐르는 동안 남편과 함께 쌓아온 게 있을 텐데.
그리고, 살의 조차.
인간이 지닌 감정 가운데 가장 격렬한 감정일 터인 살의조차 내 마음에는 남지 않아.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게,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

p238

 

한 남자가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그는 20년 전 긴자에서 무차별 살인으로 세 명이나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 남자를 살해한 사람은 그 20년 전 사건에서 부모를 잃은 카시하라 마유코였다. 그런데 경찰서로 신고 전화를 한 것은 다름아닌 마유코.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라는 충격적인 말로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20년 전 무차별 살인범을 피해 달아나다 차도로 뛰어들었고, 그 때의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장애를 안게 되었다.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은 물론, 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도, 부모님이 20년 전 사건으로 돌아가셨다는 것도 모두 잊고, 오로지 대학생이었던 그 때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건지도,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금새 잊어버린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만큼 그녀의 원한이 깊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녀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운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인가??!!

 

소설 속 상황은 계속 반복된다. 심문을 받다가도 깜빡, 유치장에 들어가서도 깜빡, 도무지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 건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마유코가 처음에는 무척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반복해서 읽다보니 어쩌면 마유코의 답답한 상황, 그녀가 사건 후 보내온 고통의 시간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되지 않는 묘사만으로도 이렇게나 가득한 절망을 맛보게 되는데,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제대로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런 마유코를 지탱해 주는 것은 그녀의 남편 카시하라 미츠하루다. 그는 마유코의 교통사고 피의자였다. 자신의 책임으로 마유코가 기억장애를 얻게 되자 이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

 

누구보다 의심스러우면서도 헌신적인 미츠하루의 희생은, 사건을 담당한 형사 유카의 상황과 대비되며 더 극적으로 묘사된다. 유카의 어머니는 치매로 현재 요양원에 모셔져 있다. 자식들 각자의 상황도 있고, 간병하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지 느끼고 있는 유카지만,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자신에게만 어머니 간병을 미루는 형제들에 대한 원망등이 어우러져 몹시 괴로워한다. 그런 유카와는 달리 어떻게든 마유코가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미츠하루. 하지만 그에 대한 심상치 않은 증언과 수상한 행적이, 그 또한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했다.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은 매우 감성적이다. 어찌 이리 사람의 마음을 후벼팔 수 있는지.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다. 일이 벌어진 후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 그 엄청난 파장을 그리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반전과 마지막 장면을 접하고 나서는 가슴에 차오르는 슬픔과 애잔함으로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부디 이런 삶은 살지 않게 되기를, 누구도 이런 가슴 아픈 상황을 접하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되는 작품들. 마치 금방 타오르고 꺼져버리는 생의 한 자락을 마주한 것 같아 그 여운이 오래 남는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감성 미스터리를 선사해줄지, 그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본다.

** <제우미디어>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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