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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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약간 선정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강렬한 색감에, '페미니즘 문학의 문을 연 바로 그 소설'이라는 문구에, 속된 말로 잠자리를 가질 수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파고든 까닭이다. 그저 순수하게 '먹는다'는 행위를 염두에 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 순진하게 생각할 나이는 지났나 싶어 약간 씁쓸. 하지만 누구라도 오해할만 하지 않나! 마성의 마여사라면, 이런 제목을 떡하니 올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설문지를 작성하고, 작성한 설문지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회사에 다니는 메리언은 '평범한' 여자다. 남편 없이 아이를 낳고 싶다면서 대상을 물색하는 에인슬리와 어느 새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클래라 사이에서, 만나고 있는 피터와 은연 중에 결혼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성. 이 시대의 남자들은 결혼을 원하는 여자를 무슨 꽃뱀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메리언은 피터를 압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회사에 다니는 무리들과도 결혼을 갈망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결혼이 인생의 목적인 듯 행동하지는 않는 메리언에게 피터가 청혼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 여기저기서 '여성성'을 강조하는 소리를 듣던 메리언이 갑자기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고기를, 다음에는 야채도, 그리고 아무것도.

당신은 왜 요리를 할 줄 몰라?

p91

[먹을 수 있는 여자]는 1965년 탈고되어 1969년 마침내 세상빛을 보게 된다. 당시는 여성운동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캐나다의 젊은 여성들은 '미래가 없는 직장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결혼을 탈출구로 삼을 것인가'의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신만의 확고한 경력 없이 결혼을 하고 가정주부가 되어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하나의 법칙처럼 통용되던 시절. 요리는 당연히 여성의 몫이었고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을, 어쩌면 남자들은 비난의 눈초리로 쳐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에인슬리의 아기의 아빠로 당첨된 렌은 '치근대는 여자가 있으면 조심해야 한다, 그들의 목적은 결혼이다, 잘 꼬드겨서 만나고 발목 잡히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로 시작해서 '여자를 교육시키면 꼭 문제가 생긴다'는 발언으로 여성비하의 정점을 찍는 인물로 등장한다.

에인슬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당신은 왜 그랬어? 당신은 뭐가 문제인가 하면......당신에게 주어진 여성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거야.

당신 결정에 따를게. 중요한 결정은 당신한테 맡기고 싶어.

p113, p127

이 작품에서는 유독 '여성성'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자신의 결정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 메리언에게 '너는 여성성을 거부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에인슬리나, 메리언이 렌을 피터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말 그대로 '뛰어다니는' 메리언을 비난하는 피터나 그녀에게 모두 '여성성'을 강조한다. 대체 뭐가 여성적인 것이고, 뭐가 여성적이지 않은 것인가. 여자니까 이래야 하고 남자니까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그런 사고방식이 한 사람이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는 데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예민하게 생각하는 현대의 나로서는 굉장히 거부하고 싶은 단어다. 요즘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왜곡된 성 역할만으로도 비난을 면치 못하는 시대 아니던가.

 

주위의 '여성성'을 피해 달아나는 듯 했던 메리언은, 피터로부터 청혼을 받고 갑자기 '여성적인' 사람으로 변화하려 한다. 결혼은 언제 했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중요한 결정은 당신한테 맡기겠다니! 두 사람이 결혼하는 날짜를 왜 한 사람이 결정해야 하나. 그것도 왜 굳이 남자인 피터에게 '중요한 결정'을. 이 문장에서부터 그 시대의 결혼이란, 여자가 남자보다 '덜' 중요한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메리언의 친구인 클래라가 결혼과 육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라면, 설문조사를 하다 우연히 만난 덩컨은 초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는 결혼 뿐만 아니라 현실의 모든 것에서 동떨어져있다. 만날 때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메리언을 사랑하거나 결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혼전순결이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에, 그러나 메리언은 이미 피터와 잠자리를 하고 있는 했지만) 너무도 태연하게 잠자리를 제안한다. 클래라나 에인슬리, 피터가 메리언을 현실에 붙잡아놓는 사람들이라면, 덩컨은 그 어떤 관계로도 명명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만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다. 결혼과 결혼이 아닌 선택지에서 고민하는 메리언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복잡한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혼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물에 편승하는 것처럼 따라가던 메리언이 이상증세를 보인 것은 피터가 청혼하고, 그녀가 승낙하고, '결혼'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에는 고기를, 다음에는 채소도,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생존을 거부하는 듯한 그 증세는, 결국 온전한 자신으로 서있지 않다는 것을, 메리언의 무의식이 알아차렸기 때문 아니었을까. '먹을 수 있는' 여자는 후에 메리언이 다시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주체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 과정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져 또 한번! '텍스트를 해석하는 능력'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여자들만 하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남자들은 하지 않았던 건가. 이런 이야기들이 그저 한 인간의 고뇌가 아니라 '페미니즘 문학'이라 명명되어야 하는 현실이 다소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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