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아무 기억도 없이 계속 걷고 있던 한 남자. 그가 기억하는 오직 한 가지는 '애나'라는 이름 뿐이다. 그 외에는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 남자가 두려움에 떨며 숲 속을 헤매고 있을 때,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도움을 호소하며 도망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뒤를 쫓아가는 정체불명의 검은 형체, 그리고 뒤을 잇는 총성. 틀림없이 애나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며 떨고 있는 남자의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 살인자라 생각되는 남자가 남겨놓은 나침반과 '동쪽'이라는 말을 단서로 숲을 빠져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웅장한 조지 왕조풍 저택, 블랙히스 하우스였다. 그런데 어쩐지 초인종을 누른 남자를 바라보는 집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애나가 살해되었으니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소리치는 그에게 한 남자가 '서배스천'이라 부르며 다가온다. 기억을 잃은 남자의 이름은 서'배스천 벨'로 의사이며 그에게 말을 건 인물은 그의 친구 대니얼 콜리지. 벨의 팔에는 칼로 난자당한 듯한 상처가 있고, 분명 여자의 비명소리까지 들었는데 사냥을 나선 사람들은 여자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

 

블랙히스에는 가장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초대받은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괴이한 점은 이 날은 바로 19년 전 저택의 주인인 피터 하드캐슬의 아들 토머스가 찰리 카버에게 살해당한 날이라는 것. 게다가 벨 앞에 중세 흑사병 의사 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 '뭘 가져왔느냐, 정신이 들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뭐였느냐, 풋맨이라는 사람이 조만간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등등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마을로 가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구간지기를 찾은 벨 앞에 놓여진 애나로부터의 쪽지! 그녀는 숲에서 살해당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드캐슬 부부의 딸인 에블린으로부터는 자신이 마약 딜러였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방에 있던 트렁크를 억지로 열었지만,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애나'라는 단어가 적힌 체스 말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벨을 찾아온 방문자. 그가 남겨놓은 선물 상자에는 살해당한 토끼가 들어 있다. 이 토끼를 보고 실신한 벨.

 

실신했던 그가 눈을 뜨자, 자신은 벨이 아닌 집사가 되어 있다! 집사인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제 분명 벨이었던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광경. 두려움과 공포로 상황 파악에 나선 집사 로저 콜린스는 그레고리 골드라는 화가와 충돌하는데, 격노한 화가로부터 심하게 폭행을 당한다. 결국 또다시 정신을 잃은 그가 깨어난 몸은 도널드 데이비스. 다시 나타난 흑사병 의사로부터 오늘밤 무도회에서 누군가가 살해될텐데 당신의 임무는 그 사건의 부당함을 바로잡는 것이며, 이 날은 앞으로 여덟 번 반복될 것이고, 여덟 명의 각기 다른 호스트의 눈으로 같은 사건을 관찰하게 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소시를 듣게 된다. 답을 찾으면 증거를 챙겨 밤 11시에 호수로 나와야 하며, 마지막 호스트가 되어 자정까지 답을 찾지 못하면 모든 기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 설상가상으로 저택에는 자신 외에도 두 명이 더 잡혀 있으며 그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이 곳을 떠날 수 있단다. 이것은 현실인가, 망상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흑사병 의사의 조언(?)대로 그 후에도 남자는 잠이 들거나 정신을 잃으면 다른 호스트의 몸으로 깨어난다. 어쩔 수 없이 게임에 응하며 사건을 관찰하기 시작한 그의 진짜 이름은 에이든 비숍. 그가 이 작품에서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너무나 많다. 일단 애나와 자신을 위협하는 풋맨부터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그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다. 게다가 또다른 호스트 레이븐코트 경의 눈으로 지켜본 에블린의 죽음 당시 장면은 살인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배에 권총을 쏘고 쓰러지는 에블린. 누군가 그녀가 자살하도록 만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택의 안주인인 헬레나 하드캐슬은 하루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녀의 방에는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이 남아있다. 에이든의 호스트인 조너선 더비의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사망하는데 이 시체의 상태도 수상한 데다, 마지막 호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니얼도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흑사병 의사는 애나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데!!초반에 얼간이같은 모습을 보이던 에이든은 호스트들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 하나하나 단서를 포착해나간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소설로 옮겨놓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각각의 호스트로서 발견하는 단서를 메모하고 나름 분석하며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까도 까도 또 나오는 양파처럼 반전에 반전을 보이는 이 작품에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추미스인지라 자세히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블랙히스'라는 공간 자체를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이런 공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뛰어난 상상력에 촘촘히 얽힌 사건구성, 주인공 에이든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녹아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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