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한 노파가 세운다는 박물관의 기사로 일하기 위해 어떤 마을을 찾은 '나'. 괴팍해보이는 그녀가 요구한 것은 -신속하게 진행할 것,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할 것, 도중에 그만두면 안될 것-이었는데, 노파가 만들려는 박물관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러는 것인가, 생각한 것도 잠시. 노파는 마을 사람들의 유품을 보관하는 박물관을 만들어달라고 말하며, 자신이 맨 처음 수집한 전지가위의 유래를 들려준다. 열한 살 되던 해 눈 앞에서 목격한 정원사의 죽음. 그 후 시작된 유품 모으기는 살해당한 늙은 창녀의 피임링, 어떤 할멈이 키우던 개의 사체, 이름없는 화가가 부상으로 움직이지 못한 채 마지막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사용한 물감에까지 달했다.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노파의 양녀인 소녀와 저택을 관리하는 친절한 정원사와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박물관 만들기에 착수한다. '나'의 중요한 임무 중에는 새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유품을 수집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가 일을 시작할 무렵부터 마을에 50년 전과 똑같은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가와 요코, 그녀 작품의 그로테스크 미학의 정점-이라는 문구에 어쩐지 무척 기괴하고 잔혹한 동화같은 이미지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읽고보니 얼마 전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가 무척 생각나는 작품이다. 일단 '나'와 소녀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등장하는 이들이 나, 손녀, 도서관 여자 등으로 지칭되는 것처럼 [침묵 박물관]에서도 노파, 나, 소녀, 정원사, 경찰 등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명칭 뿐만 아니라 분위기 또한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 박물관 기사인 '나'가 갇혀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모든 건 박물관을 위해서야.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 우리 다섯 명은 자신의 소임을 다 하고 있어. 한 명이라도 빠지면 균형이 무너지고 돌이킬 수 없게 돼. 이건 그 애가 한 말인데, 만약 침묵 박물관이 붕괴된다면 마을 사람들의 육체의 증거는 어떻게 보존하겠어? 우리는 발 디딜 곳을 잃고 세계의 끝에서 멀어지고 말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남지 않아.

p336

이렇게 작품 안에 '세계의 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침묵 박물관]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한 오마주인가.

 

수법이 잔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작품의 전체 분위기는 고요하다. 마치 커다란 유리돔 안에 갇혀 시간들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경위나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몇 군데 지점이었다. 다만, 이 작품 자체가 어쩌면 줄거리가 아닌 분위기를 따라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게 만든 것도 작가의 설정이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형이 준 현미경과 관련된 사연에서,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울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곧 다가올 노파의 죽음과 함께 새롭게 시작될 박물관 이야기,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유품의 속삭임들. 오묘하고 기이한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작가정신>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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