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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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편지 조작'이었다. 그것을 과연 단순히 '장난'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소의 악의가 들어간, 소녀들의 짖궂음이 반영된.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것의 향방이 어찌될 지 지켜보며 킬킬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 속에서 분노가 치솟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행위를 범죄라 지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경우에는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은 행동 하나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우리는 감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장난이라고 하는 모든 행위가 모두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녀들의 시작은 장난이었다.

 

조해너의 일생은 외로웠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았고 누구 하나 친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딸처럼 보살폈던 새비서조차도 그녀와 헤어질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눈물이 다 뭐란 말인가. 새비서가 떨어져 지내는 아빠에게, 조해너가 쓴 것처럼 꾸민 편지를 집어넣으면서 친구인 이디스와 작은 모의를 꾸민 것을 보면, 조해너는 결코 새비서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조해너의 삶 속에서 새비서의 아빠, 부드로가 보낸 편지 하나만이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것이 거짓일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채, 조해너는 부드로를 향해 떠난다. 사랑이라 믿으면서, 자신에게 그가 소중한 존재가 된 것처럼 그에게도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일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지만 좀 더 주의깊게 읽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쉽다고는 결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직 이 의문에 대한 답을 확실히 찾은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일상. 연못에 돌이 떨어지듯 생기는 에피소드. 그 에피소드가 만들어내는 작은 파문에 마음이 깊게 잠겨들어간다. 에피소드가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만큼인지, 사실 나는 가늠도 못하겠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건들이 그녀들에게 어느 때는 일종의 즐거움을, 어느 때는 삶의 경이를 깨닫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문은 곧 사라져간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섬세함.

 

촘촘한 작품집이다. 한 번에 읽어내려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하나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쉬지 않고서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 그럼에도 왜 나는 이 작가를, 이 작품을 이렇게 품고 끙끙거리는 것인가. 답은 모르겠다. 그저 빠져들었고, 읽을 뿐이고, 앞으로도 읽어나갈 것이라는 점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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