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엄마 친구 시후미와 내연관계인 토오루. 우연히 알게 된 시후미와 그런 사이가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음악적으로 생긴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을까,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부재중이었던 엄마 대신 자신이 받아 시후미와 다시 만나게 된 때였을까. 언제부터였든 이미 시작된 관계 속에서 토오루는 시후미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열정, 혹은 격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사이. 그들의 관계는 조용하고 고독하지만 그렇다고 시후미를 향한 토오루의 사랑이 얕은 것은 아니다.

토오루에게 있어서 세계는 온통 시후미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끓였다. 시후미를 만날 가망도 없는 하루, 대체 뭐 하러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p135

토오루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역시 가정주부 키미코와 불륜관계인 코우지. 토오루-시후미와는 달리 이들의 관계는 거칠다. 만날 때마다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서로의 몸을 탐하는 그들 사이는 야생적이고 본능에 가깝다. 즐겁게 생활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코우지는, 과거를 통해 자식있는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세워놓고, 의외로 착실히 대학수업에 참여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언제까지 키미코와의 관계가 계속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녀를 만나고 관계를 가지면,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아니라고 되뇌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가 15년만에 개정, 출간되었다. 나에게는 소설보다 영화로 더 인상깊었던 작품이고, 영화도 내용보다는 삽입되었던 OST로 더 기억 깊숙이에 남아있는 이야기다. 예전의 나는 아직 어려서 토오루와 코우지의 이야기에 경멸 섞인 비난을 내던졌던 것 같은데,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어보니 역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여전히 불륜관계를 다루는 작품들은 달갑지 않지만 세상에 절대 안되는 일은 어쩌면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나에게, 이상하게 시후미를 향한 토오루의 사랑이 애달프게 다가왔다. 열 일곱, 고등학생일 때 처음 만난 시후미, 엄마 친구인 데다 열 몇 살이나 연상인 그녀에게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빠져들어버린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랑인 것인가.

시후미는 마치 작고 아름다운 방과 같다고, 토오루는 가끔 생각한다. 그 방은 있기에 너무 편해서, 자신이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p117

시후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 뻘 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 시종일관 침착한 데다, 토오루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쉬이 내비치지 않는다. 딱 한 문장으로 나타날 뿐이다. 말도 안 되게 사랑한다고, 이런 일 믿어지지 않는다고. 온갖 열정적인 사랑 표현들 앞에서 담백하게 느껴지는 표현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후미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시후미가 토오루에게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는 것은 알겠다. 함께 살 수는 없지만 함께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

 

키미코는 그런 시후미와 여러모로 반대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보통의 주부지만 코우지를 만났을 때만큼은 거침없는 그녀. 심지어 코우지를 향한 속박과 집착의 욕망을 서슴없이 내보이기까지 한다. 그녀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코우지가 자신에게 진심일 리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자신이 먼저 버린다'는 코우지의 속내를 짐작했었던 것일까. 그런 코우지를 비웃듯 이 관계 속에서 먼저 뛰쳐나가는 것은 키미코였다. 그녀에게 코우지는, 그와의 관계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살아있게 될까.

 

책을 읽는 내내 현실에서는 내리지 않는 빗소리가, 내내 귓가에 들려왔다. 에쿠니 가오리식 사랑 이야기에는 공감하기 힘든 점이 많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도쿄타워]에는 그저 속절없이 빠져들고 만다. 문장이 어려운 편도 아니고, 이야기 구조가 복잡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금방이라도 울음이 날 것처럼 목이 메어와서 쉽게 읽어내려가기는 어려웠다.

 

이것이 에쿠니 가오리의 감성이었나. 자꾸만 가슴에 바람이 불어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