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주년 특별판 시리즈의 세 번째 도서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1987년 발표된 이 작품은 노예라는 운명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딸을 죽인 흑인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노에제의 참상을 시적인 언어와 환상적인 서술 기법으로 풀어낸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이다. 퓰리처상, 미국도서상, 로버트 F.케네디 상 등을 연이어 수상했고, 2006년 <뉴욕타임스>가 조사한 1980년 이후 최고의 미국소설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하버드대 학생이 가장 많이 구입한 책 2위에 뽑혔다. 1993년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이 서린 집, 124번지. 그 곳에는 갓난아이의 독기가 가득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 원혼을 견디며 살았지만 이제 이 집에 남은 사람은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 뿐. 그저 문장 뿐일 것이라고, 설마 정말 유령이 나타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 이어지는 묘사는 정말 이 124번지에 원혼이 있음을 알려준다. 깨져버리는 거울, 케이크 위에 찍히는 작디작은 손자국 두 개. 세서의 두 아들은 달아났고, 세서의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는 손자들이 달아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두 여자만이 외롭게 집을 지키는 그 곳에 세서의 옛 친구이자 한때는 운명공동체였던 폴 디가 나타난다. 곧 이 집에 머물기로 결정한 폴 디. 그는 세서가 있는 곳에 머물기 위해 유령을 쫓아버렸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빌러비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124번지에 서린 원혼의 정체는 세서의 세 번째 아이, 덴버의 언니였던 '벌써 기나'였다. 스위트홈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두 아들과 '벌써 기나'를 먼저 보내고, 남편 없이 덴버를 뱃속에 간직한 상태로 탈출을 감행한 세서. 오랜 여정 속에서 홀로 덴버를 낳았고, 124번지에 도착해 한 동안 기쁨과 자유를 맛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을 찾아온 '학교 선생'을 발견한다. 아이들을 모두 끌어모아 헛간으로 들어가 두 아들은 벽에 집어던지고, '벌써 기나' 의 목은 톱으로 잘라 죽게 했다. 머리가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받치고 있었지만 이미 아기의 목에서 흐르는 피와 함께 생명은 빠져나갔다. 그런 어미의 심정은, 감히 상상할 수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세서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그 곳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방법이 있었겠지, 그는 말했어. 분명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그럼, 학교 선생이 우리를 끌고 가게 내버려두라고? 엉덩이 치수를 재고는 갈가리 찢어버리도록?

난 그게 어떤 기분인지 이미 느껴보았고,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인간이든 나자빠진 인간이든 누구든 너한테까지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넌 안 돼. 내 자식들은 절대 안 돼.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은 내가 네 것이란 뜻이기도 해. 내 자식들 없이는 절대 숨을 쉬지 않을 거야.

p333

부모에게 자식의 생사여탈권은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내가 낳았지만 아이들의 생명은 그들의 것이므로, 감히 내가 아이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세서를 마주하고나니 내가 세서라면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아닌 짐승 취급을 당하고, 교미를 강요당하고, 강간당하는 삶이라니. 그런 것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받지 말아야 할 온갖 모욕과 수치심을 안은 채 평생을 고문당하는 삶 속으로 아이들이 들어가야 한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나조차도 모르겠다. 노예제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감히 내가 공감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서의 아픔과 결정을 비난하지는 못하겠다.

 

담담한 듯,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서지만 빌러비드로부터 '벌써 기나'의 흔적을 찾은 뒤부터 상처의 고름이 다시 흘러나온다. 평소의 생활은 포기한 채 오직 빌러비드를 먹이고 둘봐주는 데 몰두한다.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과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작가는 빌러비드라는 신비한 존재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고, 서로에게 영원히 들려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원망과 위로와 사랑의 말을 주고받게 한다. 하지만 빌러비드가 위협적인 존재로 변화해가고, 124번지 앞에 나타난 백인 남자를 노예 사냥꾼이라 착각한 세서가 딸이 아닌 그를 향해 얼음송곳을 휘두르는 결말을 통해 세서에게 새로운 기회와 미래를 선사한다. 과거의 아픔을 뛰어넘어 드디어 현재를 살아가게 된 것이다.

 

빌러비드의 정체는 나에게 여전히 아리송하다. 정말 유령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존재였는지. 작가의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선을 밟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름다운 문장, 가슴 저미는 이야기.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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