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왕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 / 세종서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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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스톡홀름의 온갖 쓰레기가 떠다니는 파트부렌 호수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맞은 시체가 발견된다. 사지와 두 눈, 이가 하나도 없이 심각하게 훼손된 사체. 제복만 입은 명목상의 방범관인 미켈 카르델은 이 시체를 호수에서 처음 건져낸 인연으로 치안총감 놀린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세실 빙에와 사건 해결에 나선다. 그들이 칼 요한으로 이름붙인 시신은 오랜 시간을 두고 사지가 절단되어왔으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엄청난 악의와 잔인함이 숨어있음을 감지한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빙에. 게다가 그에게 전권을 준 치안총감 놀린은 너무도 정의로워 권력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탓에 곧 그 자리에서 물러날 위기에 처해 있다. 야망에 찬 후임 치안총감이 오기 전까지,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전까지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빙에와 자신이 물속에서 건져 낸 칼 요한의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카르델.

 

-빙에 씨, 혹시 '호모 호미니 루푸스 에스트'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플라우투스가 포에니 전쟁에서 남긴 말이지요. '사람은 만인에게 늑대다'.

......

빙에 씨, 제가 어째서 당신을 도와야 합니까? 죽음을 눈 앞에 둔 제가 뭣 하러 두 늑대 중 더 힘센 쪽임을 증명한 살인범을 잡는 헛된 도전을 하겠습니까?......당신은 어떤 늑대입니까?착한 늑대입니까? 능숙한 사냥꾼입니까?......제가 냄새를 맡는 걸 도와드렸으니 이제 냄새를 좇아 숲으로 들어가 발자국을 찾으십시오. 당신의 표정이 바뀌는 걸 전 분명히 봤습니다. 절 속일 생각은 마시지요! 당신이야말로 진짜 늑대입니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당신이 늑대인 건 분명하지만, 만에 하나 제 짐작이 틀렸다 해도 당신은 조만간 완연한 늑대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늑대 무리와 함께 달리려면 늑대들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송곳니가 생기고, 포식자의 눈빛을 띠겠지요. 피에 굶주린 본능을 거부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 주변에서 피 냄새가 악취처럼 피어오를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당신의 이가 피로 벌겋게 물들고 나면 당신도 내 말이 옳았단 걸 알게 될 겁니다.

p92-96

1700년대의 격변의 시대를 거치고 있는 스웨덴을 배경으로 특유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숨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전개되어가는 [늑대의 왕].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파산 위기에 처해진 나라 안에서 죽지 못해 삶을 이어가는 백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카르델은 전쟁에서 아끼는 친구를 잃었고, 죽음의 순간 왼팔을 잃었으며 여기저기에서 횡행하는 고된 삶의 모습을 외면하고자 술에 빠져 사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호수에서 건져 올린 칼 요한은 카르델에게 과거의 악몽을 상기시키는 인물이자, 파도에 휩쓸려 죽은 친구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뭍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을 전해주었다. 결국 그 기분에 전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빙에에게도 사연이 있기는 마찬가지. 폐결핵에 걸린 후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자 그 현장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스펜스 백작 집에서 방 하나를 빌려 살고 있다. 감정보다는 이성에 기반을 두고 범죄자에게도 심문받을 권리를 주어 충분히 그 이야기를 듣고 죄를 판단하는 것으로 유명한 빙에. 어쩌면 인생 마지막 사건일 수도 있는 수사에, 마지막 남은 시간을 쏟아붓는다.

 

작품은 이들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소제목은 1793년 가을로 시작해 여름, 봄, 겨울로 끝을 맺는데 순서가 엉켜 있어 처음에는 책이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닌가 의심도 했다. 하지만 1793년 가을에서 빙에와 카르델이 칼 요한을 발견하고 수사하기 시작한 것을 묘사했다면, 여름에서는 칼 요한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크리스토페르 브릭스의 회고록이 펼쳐지고, 봄에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을 대표하는 안나 스티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그리고 겨울에서는 마침내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게 된다. 인상적인 인물들과 다양한 시각에서 묘사된 사건의 깊은 이야기가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며 그들의 얽히고 설킨 인연들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 인물처럼 생명력을 가지고 작품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여러모로 가슴 아픈 작품이다. 어쩌면 등장인물 중 그나마 나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미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각자의 사연이 기구하다. 빙에의 이야기도, 크리스토페르의 이야기도.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안데르스 페테르에게 겁탈당할 뻔 했음에도 오히려 매춘부로 몰려 교화소에 끌려가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던 안나 스티나의 이야기는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비극성이 더해진다.

 

칼 요한의 시체는 그 묘사된 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어떻게 인간이 한 인간에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범인 앞에서조차 빙에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범인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고 왜 칼 요한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당연히 연민이 느껴진다. 범인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도 마음이 아프고, 그의 보호자에게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가 칼 요한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일에 변명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빙에는 자신만의 정의를 실행한다. 그의 마음에도 상처를 남길 방법으로. 그는 결국 한 무역상의 예언처럼 피에 굶주린 늑대의 왕이 되고 만 것인가!

 

작품이 전달하는 특유의 분위기, 주먹을 주로 쓰는 카르델과 예리하고 냉철한 분석력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빙에, 이 두 사람의 조합에 나는 그만 반해버렸다. 하나의 구멍도 발견할 수 없는 치밀한 구성과 입체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들까지. 어느 하나 비판할 거리가 없다. 이런 노련한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부디 빙에를 폐결핵으로 잃게 하지 마시기를. 18세기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 '벨만 누아르 삼부작' 중 첫 번째 책인 [늑대의 왕]을 시작으로, 2019년 출간된 후속작 [1794]또한 출간 즉시 여러 나라에 판권이 팔렸다는데, 여기서도 이들을 볼 수 있으려나. 어서 [1794] 도 만나보고 싶다. 빨리!

 

참고로 작가의 이름이 무척 발음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나트 오크 다그'는 '밤과 낮'이라는 의미를 지닌 현존하는 스웨덴 최고의 귀족 가문으로, 이 성은 가문의 문장인 금색과 푸른색으로 위 아래가 나뉜 방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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