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쳤던 그 해. 떠나는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마을에 남기로 결정한 셴 할아버지와 태양 빛에 눈이 멀어버린 개 장님이. 마지막 남은 옥수수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무색할만큼 하늘은 한 방울의 비도 내려주지 않는다. 늙은 몸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걸어잠긴 남의 집 걸쇠를 따고 들어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기도 하고, 말라가는 우물에 이불을 넣어 그 수분을 흡수해보려고도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땅에 묻힌 옥수수 몇 개, 떨어진 옥수수 몇 낱알을 얻기 위해 쥐와 사투를 벌여야 하고, 먹을 것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는 쥐를 잡아 가죽을 벗겨 삶아 먹기도 했다. 이 땅에 먹을 것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지축을 흔들며 이동하는 쥐의 무리는 검은 파도같기도 하다. 우연히 찾아낸 샘물가에서 맞닥뜨린 늑대 무리마저 생존을 향한 셴 할아버지의 굳은 의지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과연 셴 할아버지와 장님이는 마지막 남은 옥수수를 지킬 수 있을까.

가뭄과 태양, 옥수수와 한 노인, 그리고 개 한마리와 쥐, 늑대무리만을 등장시켰음에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그림같은 작품을 만났다. 작가는 옌렌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로 이미 우리나라에 작품이 소개된 바 있는 그는, 제1,2회 루쉰문학상과 2014년 프란츠카프카 문학상, 홍루몽상 최고상을 비롯해 20여 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현재는 중국 평단의 지지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얻으며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평가되고 있는 작가. 그 옌렌커가 직접 고른 중단편 모음집이 바로 [연월일]이다. 이 작품집에서는 앞서 소개한 <연월일>과 <골수>, <천궁도>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의 총 네 편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데,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두 박수를 보내고 싶을만큼 완벽한 소설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뭄을 이겨내기 위한 한 노인과 개의 모습은 일견 다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어떻게든 옥수수를 지켜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노인과 자신을 거둬준 노인의 곁을 한 시도 떠나지 않는 장님이. 거대한 쥐의 무리 이동을 묘사한 부분도 장엄하게 다가오지만 아홉마리의 늑대 무리와 셴 할아버지의 대치 장면은 실로 압권이라 할만큼 인상깊다.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목숨을 건 응시, 한 걸음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그들 사이에 놓여진 긴장감이 어마어마하다. 나조차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장님이의 목숨을 놓고 던진 동전에 관한 이야기는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기에 완벽할 정도로 감동깊다.

동전은 오래됐는지 초록색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초록색 녹을 문질더 닦아내자 동전의 한 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반대 면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양쪽 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동전을 본 적이 없었다.

p153

생명 옆에 항상 따라다니는 죽음을 느낄 수 있는 옌렌커의 작품답게 <골수>, <천궁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에서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바러우산맥이 바라다보이는 허난성 충현의 험준한 농토를 배경으로 농민들의 삶과 죽음, 그들이 절대로 떠날 수 없는 땅과 노동, 생존과 욕망 등에 대해 노래한다. 투박하다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지만 대신 서사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 굵은 선을 자랑한다. 그렇다고 간단하고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다.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장면들의 묘사는 마치 한 편의 영화나 그림처럼 아름답고 처연하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외에 가슴을 울리는 중국문학은 처음이었다. 과연 노벨문학상 후보로 몇 번이나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 가혹한 현실에서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을 섬세한 필치와 회화적인 시어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는 받는 그의 실력은, 이 작품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휴머니즘과 가슴 먹먹한 감동을 부디 느껴보시기를. 나는 어서 옌렌커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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