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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대단하면서도 평범한 사랑의 모습들]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하는 히나가 미야자와를 만난 것은 그녀가 졸업한 노인요양복지전문학교의 입학 안내 팸플릿 을 제작하기 위한 인터뷰 때문이었다. 팸플릿에 졸업생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으니 꼭 인터뷰에 응해달라는 교장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에 인터뷰에 나선 히나. 팸플릿은 제작되었고 우연히 가진 술자리가 파하고 미야자와가 히나를 집까지 데려다 준 후 둘의 관계는 변화한다. 명목은 히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정원에 우거진 잡초를 베러온다는 것이었지만 여섯 번째 만났을 때 결국 잠자리를 가진다. 그런 히나에게는 전 남자친구 가이토가 있다. 전문학교 시절 사이좋은 동기였던 가이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히나 곁에서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고, 그 마음에 히나는 '보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미야자와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들은 헤어진 상태였음에도 가이토의 히나를 향한 집착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런 가이토에게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하타나카가 접근한다. 남편과 이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지만 자신은 모성애를 느낄 수 없다는 그녀. 멋진 외모에 경박해보이는 분위기로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어왔고 가이토와의 관계 또한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사랑과 인간 관계 앞에서 세상 진지한 이 남자에게 자꾸만 끌린다. 가이토가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가려는지 한 번 따라가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미야자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도 진심으로 좋아한 적이 없는 그다. 이번에 히나를 만나면서 변화가 생기려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듯. 네 남녀의 관계가 달콤하면서도 쌉사름하게 그려져, 세상에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 그럼에도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이상한 연애소설이다.
구보 미스미는 2009년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소설 공모전인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연애소설은 정서적으로 잘 맞지 않아 자주 찾아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 동안 읽어왔던 다수의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연애와 관계가 다소 쿨하게 그려져 있던 것과는 다르게 [가만히 손을 보다] 속 주인공들의 욕망과 성행위는 무척 적나라하다. 초반부터 그려지는 노골적이고 대담한 성행위에 대한 묘사를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 심지어 욕망의 주체는 여성으로 히나와 하타나카 모두 자신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데 자연스럽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우리는 여성의 욕망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모른 척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한 부분으로 묘사되는 성행위는 그렇기에 야하게만 느껴지지 않고 때로는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도구, 누군가를 붙잡고 싶은 필사적인 몸부림 같은 것으로도 여겨진다.
히나도, 가이토도, 미야자와도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유옥 하타나카에게 눈길이 갔다. 계획에 없던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아이에게 전혀 애정을 느낄 수 없었던 엄마.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고 자신은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문장을 통해 전달되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경박해보이고 남자 관계가 복잡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가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는, 가이토와의 관계에 충실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예전에는 '사랑'이 무척 대단하고 특별한 것인 줄 알았다. 맞다. 대단하고 특별하고 소중한 것. 그리고 일상 속에 녹아들면 평범한 것으로 변해버린 듯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버리기 쉬운 것.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도 사랑은 존재한다. 우정이든, 격렬한 열정이든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아껴주라는 것,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것. 지금의 평범한 일상 속 녹아있는 사랑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