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속 등장하는 명대사 중 하나. 나는 이 장면을 읽고나서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이제 막 시작되는 감정을 숨기고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해소하기 위해 장난처럼 던졌던 질문.
그 질문에 대한 상대의 대답은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야 들을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만나 다시 이 대화를 나누기까지 보내야했던 그 많은
시간들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똑똑히 기억하는 대답. 읽는 순간부터 뇌리를 떠나지 않고 가슴 시린 눈물을 끝내 흘리게 만들었던
장면이었다. [우아한 연인]을 읽은 독자라면 어째서 내가 이 부분을 이렇게 사랑하는지, 왜 잠을 이룰 수 없었는지 이해할 것이다.
1966년 10월의 어느 밤, 중년의 끝자락에 이른 케이트와 밸 부부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워커
에반스가 1930년대 말에 뉴욕 지하철에서 몰래카메라로 찍은 인물사진들을 처음으로 전시하는 자리. 밸과 함께 찬찬히 사진을 둘러보던 케이트는 그
안에서 예상치못한, 팅커 그레이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녀를 멈춰서게 한 두 장의 사진. 이미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단번에 기억 속에서
떠오른 그 남자.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녀를 휘어잡은 팅커의 사진은, 케이트를 다시 달콤했지만 불확실했던 과거로, 그 때의 우연한
만남들이 빚어낸 찬란하고 순수한 시대로 불러들인다.
재즈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1937년의 뉴욕. 서로를 사랑하는 친구 케이트와 이브는 젊고 능력있는 신사 팅커와 우연히
만나 맨해튼의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 멋진 음악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각자 서로에게 이끌리는 세 사람. 만약 그 날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사고는 일어났고 이브가 얼굴과 다리를 다치게 되자, 팅커는 죄책감에 그녀의 인생을 책임지기로 결심한다. 조지
워싱턴의 '품위의 규칙'을 삶의 철칙으로 삼던 팅커의 결정으로 세 사람의 관계는 급변했다. 극장에서 누가 누구의 옆에 앉을지 결정하는 것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케이트와 팅커 두 사람만 만나 커피를 한 잔 했다는 것에 이브가 질투했던 소소하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날들. 그 날들을 뒤로 한
채 이제 그들은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데뷔 소설이 아니라 열 번째 작품같다'는 찬사를 들었던 것으로 유명한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이 시대의 낭만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완벽한 표지와 판본으로 개정되었다.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은 뒤 그의 데뷔작이 궁금했지만 절판되어 읽을 수
없었던 아쉬움을 이 개정판으로 달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엄청난 찬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나는
이 작품에 깊이 빠져버렸다. 서로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케이트와 이브, 팅커의 마음이 유치하고 치졸하지 않고 담백한 문체와 절제된 감정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실제 틀어놓지도 않은 음악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고, 케이트가 읽는 책들은 또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 그녀가 무인도에 간다면 가지고 간다던 [월든]을, 팅커가 나중에 읽어보았다는 대목에서도 내 심장은 덜컹거렸다. 상대의 사소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것. 어떤 매개를 통해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뉴욕에는 아직 가 본 적이 없고, 1930년대의 분위기가 어떠한지는 더더욱 모르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그
시간, 그 장소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연한 만남이 빚은 사랑, 사고, 그 만남들에서 파생된 또다른 만남들. 전쟁의 비극과 대공황의 시련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젊은 그들은 자신들의 젊음을 만끽하며 음악과 문학을 자유롭게 즐기고 웃는다. 시대가 전하는 순수와 낭만. 아,
정말이지 나는 이 작품이 전달하는 이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가슴 설렘. 아련한 향수.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에이모 토울스는 한 작품당 4년은 시간을 들인다고 했다. [모스크바의 신사]가 국내에 출간된 것은 2018년. [우아한 연인]은
데뷔작인만큼, 다음 작품을 읽으려면 2022년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때까지 [우아한 연인]과 [모스크바의 신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열심히 기다리련다. 이제는 에이모 토울스와 사랑에 빠질 시간. 부디 이 작가와의 우아한 밀회를 여러분도 포기하지 마시기를. 올해 읽은
작품 중 TOP5 안에 들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