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학자금 융자 서류 준비가 미흡한 탓에 원하던 예일 대학 대신 변두리의 라일랜드로 진학한 그리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긴 부모님의 사랑 대신 독서로 삶의 대부분을 채웠으며 그만큼 명석하고 생각이 깊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소리내어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움을
타는 그녀였다. 어떻게든 라일랜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참석한 파티에서 대런 틴즐러라는 남학생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충격에 빠진다. 강간은
없었다고 되뇌이며 자신을 안심시키려 해보지만, 다른 여학생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저질러 징계위원회에 회부 당하고도 별다른 조치 없이 멀쩡히 학교에
다니게 되는 그를 보면서 사회 속 날것의 여성의 입장에 대해 깊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침 미국 여성운동의 중심 축인 60대 운동가
페이스가 강연을 위해 학교로 찾아오고, 그리어는 그녀에게 깊이 매혹당한다.
[여성의 설득]은 내면의 목소리를 간직만 하고 있던 그리어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밖으로 내어 유명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한
여성의 성장소설이자,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인물을 조명하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여성운동가로서 목소리를 드높인 페이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로
인해 진로까지 결정하게 된 그리어를 통해 한 인물이 다른 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더불어 그리어가 엄청난
환상을 품고 있던 페이스 또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현실의 어느 한 점과는 타협하게 되는 이중적이고 정당하지 못한 인물이었음을 드러내며 이
세계에서 여성, 혹은 여성운동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남긴다.
페미니스트적 요소가 다분함에도 남녀노소를 떠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소재를 과하지 않게 다루면서 다른 이들의 삶과
맞닿아있게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어의 연인인 코리는 그녀가 행동할 수 있게, 내면의 목소리를 밖으로 꺼내는 데 있어
주저하는 그녀를 지지하는 인물이자 온전한 하나의 캐릭터로 '진짜 인생'에 대해,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동생을 잃고 가족이라는 기반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직업과 미래를 포기한 채 어머니를 보살피는 데 시간을 보내는
그를, 그리어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어의 어머니는 가족이 무너졌을 때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돌보는 그야말로 일종의 대단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한다. 이 장면에서 작가가 말하는 페미니스트란,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의 신념, 자신이 해내야 할 것에 집중하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데 자신을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그 월리처의 작품은 [여성의 설득]이 처음이었고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작품도 그리 많이 읽은 적은 없지만 이 작품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굳이 생각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껄그럽고도 부당하게 여겨져왔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여성의 야망, 여성들의 연대.
이런 것들이 과연 지금의 우리 여성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어떻게 그 의미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 등에 대해 고민하는 심도있는 작품이다. 냉철한 현실과 소재를 풀어나가지만 분위기
자체는 따스하다. 이런 작품을 영화로 어떻게 표현했을지 그 뒷 이야기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