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본도 너머에 있는 작은 섬 홀데트에 사는 호더 가족. 솜씨 좋은 목수였던 아버지 실라스 아래에서 형제 모웬스와 옌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의 교감으로 충만했던 막내아들 옌스는 어린 시절 누구보다 잘 생기고 총명한 아이였지만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삶에 균열을 느낀다. 그 후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은 '그 무엇이라도, 그 누구라도' 그를 떠나서는 안됐다.
물건들을 원상태 그대로 보관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옌스는 자신의 관리 하에 들어온 모든 물건들에 끈끈한 유대감을 느꼈고, 누군가
그 관계를 깨려 들 때마다 두려움마저 느꼈다. 가족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마리아와 결혼한 후 얻은 쌍둥이 남매 중 아들을 사고로 잃은 후
어린 딸 리우에게는 평범한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생활을 보내도록 해왔다. 동물 가죽을 벗기는 법, 덫을 놓는 법, 숲에서 길을 찾는 법, 그리고
밤에 조용히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는 법.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기묘하고도 섬뜩하게 가족을 보호하려는 남자,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소녀의
시선에서 꾸밈없이 드러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빠가 할머니를 살해하던 날, 하얀 방은 완전 깜깜했다'라는 충격적인 첫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자발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이어나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가족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단절, 방치, 왜곡된 사랑, 정신분열, 저장강박증, 절도, 살인, 은폐
등의 이야기가 어둡고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한 소녀의 시각에서 서술되면서, 글을 읽어내려가면 뒤따라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느 정도 반감시켜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어른의 시선에서 보면 당연히 잘못되었고 굉장히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이 리우의 입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고 다른 환경을 접할 기회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시작은 옌스가 그토록 사랑했고 교감했던 아버지 실라스를 갑자기 잃은 충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는
완전하다고 생각했던 삶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추억과 감정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를 잃음으로써 비틀어져버린 것이다. 거기에서
비롯된, '자신의 것'으로 인식된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다는 강박증이 가족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친 것인데, 이것이 그 동안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여겨지는 나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건 그냥 범죄. 리우를 자신과 아내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려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밤이
되면 리우와 함께 다른 가게나 집에 있는 물건을 몰래 가져온다. '사회'가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리우의 사망신고를
위조하고, 아이에게는 그 어떤 교육이나 좋은 것들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접하지 못하게 한다.
의문스러운 것은 평범하고 이지적이었던 옌스의 아내 마리아가 어떻게 '그 지경'까지 갈 수 있었는가다. 쌍둥이 남매를 출산하고
얼마 후 아들을 사고로 잃었고, 그 후 옌스의 의견이나 주장에 동조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 작품 안에 드러난 그녀의 편지글이나 서술로는 그 간의
과정을 알 수 없어 조금 답답했다. 아들을 잃은 고통과 슬픔은 정말 십분 이해하지만 남아있는 딸 리우를 위해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을 전혀
못했나. 마리아라는 인물은 리우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장치인 동시에, 리우를 옌스 집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다.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서술되었다는 점 때문인지 계속 리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조용하고도 기괴한, 마음을
옥죄어오는 듯한 불안감과 정체모를 두려움. 옮긴이는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고
했는데, 이건 독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한 남자의 광기와 어긋난 사랑이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스릴러 소설로 다가왔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는데, 소설임에도 리우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궁금하고
걱정됐다. 부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는 말기를, 그 광기를 제발 잊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독특하면서 언짢은 소설. 그런데도 읽기가 멈춰지지 않는
작품.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