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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도진기 작가의 책은 [합리적 의심] 딱 한 권 읽어봤을 뿐이지만 [판결의 재구성]을 보니 소설보다는 논픽션 작가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합리적 의심]에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장면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다소 있었던 데 반해, [판결의 재구성]은 좀 더 깔끔하게 갈무리 된 느낌이다. 작가 자신이 밝힌 것처럼 '밀도'라는 측면에서 지금껏 가장 공을 들인 글들이기 때문일까. 적당히 사건을 조합하지 않고 반드시 판결문을 구해서 참조했다는 말에 작가의 정성과 의지가 돋보인다. 이 책은 작가 도진기가 20년의 판사 생활을 통해 들여다 본 30번의 판결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는 명쾌하게 해결된 사건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콜드 케이스로 남은 사건도 있어 조금 답답증을 느끼게도 한다는 점이 단점 아닌 단점이라고나 할까.
이 책의 핵심은 변호사가 된 후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판결의 재구성> 원고이다. 각 파트의 끝에 실린 짧은 수필들은 조선일보 <일사일언> 코너에 쓴 것이고, 다른 매체에 게재한 서평도 두 건 있다고 밝혀져 있다. 또 글을 쓴 뒤 새로운 사건 전개가 있은 경우 추신을 달아두었는데, 대법원에서의 사건의 진행상황이나 유족이 나라에 소송을 제기한 경우 등이 메모되어 있다. 2004년 사라진 변호사 사건을 시작으로 1997년의 이태원 살인사건, 그 유명한 2010년 낙지 살인사건과 1995년에 벌어진 김성재 살인사건, 2010년 부산의 시신 없는 살인사건, 2017년 약물로 아내를 살해한 의사 사건, 1999년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판결과정과 결과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깔끔하게-라는 단어를 쓰기가 참 민망할 정도로 각각의 사건들이 다 너무 무섭고 잔혹해서 가슴이 떨려온다.
미스터리와 추리, 스릴러 장르를 즐겨 읽는 나로서는 사건의 과정과 결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읽어내려가다보니 제목만 보아도 속이 울렁거릴만큼 현실이 더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표출하는 사람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이웃의 곤경을 방치한 사람들의 모습은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작가가 다룬 사건 속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소설의 악인과 다르지 않았다. 나라면 이 원고를 집필하면서 몇 번이나 펜을 집어던졌을 것 같다. 작가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 재판의 경과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역시 그 또한 재판관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잃지 않고 '가령 ~'을 방패삼아 약간이나마 분노하게 하는 판결에 대한 응어리를 풀어준다. 그럼에도 대구에서 황산 테러를 당한 태완이 사건을 읽으면서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가 있든,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챕터 사이에 실린 [망량의 상자] 서평과 [GOTH 고스] 서평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망량의 상자]는 나도 예전에 읽었고 소장하고 있던 터라 무척 반가웠지만 [GOTH 고스]는 이제는 절판에 도서관 목록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아 어떻게 구해 읽어야 하나 아쉬울 따름이다. 이 와중에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라니, 제목만 보고도 웃음이 터져버렸다. 작품의 홍보문구에 대해 묻는 출판사 직원에게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 보내겠다!'라고 했다니, 그 출판사 직원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한편으로는 정말 그 문구를 썼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법부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이건 우리 사회의 질서이다.
하지만 판결 안의 추론 과정에서마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늘 옳다는 보장이 없고, 얼마든지 헤집어 볼 수 있다.
유전무죄 비판과 진영 논리들 때문에
오히려 면책되었던 판결의 '내부'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래야 판결이졸지 않고, 외곯 논리는 도태된다.
사실 범죄나 재판 관련된 논픽션 책들은 즐겨 읽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미드 CSI를 즐겨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람이 죽는 장면은 도저히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범죄 장면은 허구지만 현실에서 등장하는 범죄는 말 그대로 '리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하며 두려움에 젖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꽤 재미있다. 일반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판결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재미라고 할까. 덕분에 절차나 정당방위, 심신상실 등 법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법에 대해 한층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한 가지 더 느낀 것은 작가 도진기의 '성실함'과 '준비성'이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그가 이 책을 가볍게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깊이 생각하며 써내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이제 두 작품 만난 셈인데, 차곡차곡 그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선은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가 궁금한데 그의 대표작이라 꼽히는 소설 작품들도 꼭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