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사촌 루시아와 함께 레슨을 받던 고즈키 하루카는 신진 피아니스트인 미사키 요스케와 처음 만났다. 은행원인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인 어머니, 만화가를 꿈꾸는 이상주의자 삼촌,조상대대로 물려받아온 땅을 팔아 벼락부자가 된 할아버지와 함께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하루카는 이미 특대생 자격으로 유명한 사립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아놓은 상태. 부모님이 외할머니의 1주기를 치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별채에 큰 화재가 일어나고, 그곳에서 잠을 자던 할아버지와 루시아, 하루카에게 화마가 덮쳐온다.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하루카지만 온
몸에 큰 화상을 입고 피아니스트로서의 미래도 불투명해진 그녀 앞에 미사키 요스케가 레슨을 맡아주겠다며 나서고 하루카는 콩쿠르 우승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처절한 훈련을 시작한다. 한편 할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하루카에게 또다시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급기야 살인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그녀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나에게는 마성의 작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인 나카야마 시치리의 데뷔작 [안녕, 드뷔시]가 블루홀6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제8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이미 절판으로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개정판으로
볼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기쁘다.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로 일본에서는 이미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작품 중 하나로 현재는 다섯 번째
소설인 [다시 한 번 베토벤]을 연재 중이라고 한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팬이라면 '미사키'라는 성이 낯설지 않을텐데, 바로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와 법정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 미사키 검사의 아들이다. 예전 작품에서 묘사된 적도 있는, 법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돌연 음악인의 길을 택해 아버지와 절연한, 바로 그 미사키 요스케. [안녕, 드뷔시]에서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하루카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꿰뚫어보며 범인을 유추하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떠오르는 미스터리 제왕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린 한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화마로 인해 소중한
가족들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화상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기본적인 생활의식의 수행은 물론 피아노조차 칠 수 없었던
하루카는 미사키 요스케의 레슨을 받고 비로소 진정으로 피아노를 친다는 것, 피아니스트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피아노 선율에 담아내는 하루카의 모습은, 비록 글자와 지면임에도 그 열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작가의 클래식과 피아노 주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클래식과 피아노 연주에 관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작가가 현재까지 보여준 인간의 '악의'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어쩌면 이 작품을 시초로) 드러난다. 별안간 엄청난 재산의
상속녀가 된 하루카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으로나마 연주하려는 그녀의 열정을 비웃는 동급생들, 하루카의 온전치 못한
몸을 호기심과 멸시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무리들 등 장애를 가진 하루카가 뛰어넘어야 할 산은 높고도 험하다. 가족을 잃은 그녀 앞에 무감각하게
마이크를 들이미는 잔인한 기자도 등장한다. 사회 정의와 법률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역설해 온 작가가, 이 작품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며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안녕, 드뷔시]의 '안녕'은 일본어의 '사요나라'였다. 나는 당연히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하루카가 건네는 반가운 인사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원문 표기를 보고 의아하게 여겼는데, 결말 부분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피아노 연주
묘사와 소개된 클래식의 곡명을 읽다보니 저절로 검색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음악을 들으며 읽으면 그 매력이 배가 되는 작품. 앞서 소개된 여러
시리즈와는 달리 치열한 법정물이나 미스터리는 아니었지만 미사키 요스케만의 매력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다. 앞으로 발표될 그만의 이야기들이, 당연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