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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평점 :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이라니, 흥, 제목을 보고나니 코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질투다. 난 눈 깜짝할 사이 서른 몇이 되었는데. 지금 서른셋이라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꼭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온
시간들은 그것대로 애달프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서른셋 오영오가 가진 미련과 아쉬움은
무엇이었을까.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도 출판사에서 문제집 편집일을 하는 영오가 야근을 하며 떠올린 사람은 작년 가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엄마가 폐암으로 먼저 돌아가신 뒤 그나마 데면데면했던 관계가 완전히 멀어져버린 부녀사이. 그런데 아버지가 세들어 살던 집주인으로부터 유품이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남아있는 것은 엄마가 사용하던 압력솥과 그 안에 들어있는 수첩 하나. 거기에는 영오의 이름과 홍강주, 문옥봉, 명보라 세
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야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영오를 기다리는 것은 텅 빈 원룸 하나. 어머니쪽
친척도, 아버지쪽 친척도, 그 누구도 없는 무미건조한 그녀의 일상에 홍강주, 이 남자가 저벅 들어섰다. 생전 영오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어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강주의 말과 뻔뻔한 그의 태도를 보니 영오는 어이가 없다. 그럼에도 맛있는 중국집을 안다며 앞장서서 걷는 그의 뒤를
어느새 따라가고 만다. 수첩의 존재를 안 강주는 당사자인 영오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나머지 두 사람을 찾아보자고
한다. 찾아서 무얼 하게? 의아한 영오지만 이번에도 어쩐지, 강주가 하자는대로 나머지 두 사람 중 문옥봉씨를 먼저 만나러 간다.
강주가 들어서기 전 영오의 인생에 한 명이 있기는 하다. 중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둔, 영오의 아버지가 경비 일을 하던 새봄중학교 학생인 공미지. 영오가 편집한 문제집에 대해 문의를 한 것을 계기로 미지는 가끔 영오의
직통번호로 전화를 하고, 영오는 전화를 받고, 그렇게 둘의 대화와 인연이 이어진다. 공미지 학생은 고등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 조금은 독특한
공미지 학생은 친구가 없고, 친구가 없는 것을 아닌 척 더 이상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고, 또 미지에게 일어났던 어떤 일은 더 이상 학교가
매력적인 곳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런 미지를 엄마인 신여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미지는 예전에 가족들이 살던 개나리아파트 2동 702호로
돌아왔다. 옆집 703호에는 조금은 괴팍한 두출 할아버지와 고양이 버찌가 산다.
난 이제 알지도 못하는 애들하고 일 년씩 이 년씩
묶여지내지 않을 거야.
친구 없는 걸 불편해하는 척하면서 나하고만 친해지는 짓,
그만둘래.
내 맘에 드는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싶어.
난 그 사람들을 네모 말고 동그라미 속에서 찾을 거야.
엄마도 알지?
교실은 네모나고 지구는 둥글다는
거.
나이가 많든 적든, 영오든 강주든, 미지든 두출할아버지든 상처 없는 인생이 없다.
인간관계에 서투르고 마음을 내보이는 것에 주저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다가서고 두드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배려없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고,
나의 독특함이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오영오와 홍강주가 수첩 속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에 흥미를
느끼고 그들의 뒤를 주시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시간들을 통해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무엇이든 현실
속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공미지 학생과 두출 할아버지의 우정 같지 않은 우정에 흐뭇한 미소를 띠게 되는 것도,
어딘가에 분명 내 마음 한 자락 알아주는 이가 있을 것임을 믿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하유지. 낯선 작가의 이름 석 자다. 그냥저냥 청춘 이야기겠지, 흥, 콧방귀를 뀐
내 코가 아플 정도로 소설은 무척 재미있었다.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겠거니 여겼던 작품에 감동받으면, 그 감동은 배가 되어 다가온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지. 그녀의 존재가
반갑다. 앞으로 또 어떤 작품들로 경쾌하게 다가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