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깨어난다. 노아라고 불리는 그의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처음 마주한 세상은 총상을 입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베를린의 노숙자 오스카. 그는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손들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되고 있다는 자신만의 공상을 믿으며 그 힘을
피해 지하 세계에 숨어 사는 인물이다. 마닐라 독감으로 전 세계 인구의 목숨이 위협받는 하루하루, 혹한의 추위 속에서 노아는 우연히 신문에 실린
그림을 본 후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가 되살아난 노아. 신문사와 연결된 노아는 셀린이라는 여기자의 지시에 따라 오스카와 함께 아들론 호텔로
향하고, 뭔가 맞지 않는 점을 감지한 그들 앞에 킬러가 나타난다. 한편 거대한 부를 축적한 제약회사 CEO이자 인권활동가인 재파이어는, 마닐라
독감의 백신인 제트플루를 더 이상 서구사회에 제공하지 않고 개발도상국에만 지급한다고 발표하고,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그를 향해 한 발의 총알이
날아온다.
인구과잉 문제는 오래전부터 소설이나 영화 속 화제로 언급되어 왔다. 기후변화, 바이러스 감염, 전쟁 등으로 인해 지구의 인구
수는 조만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는데, 심리 스릴러의 달인인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질병을 소재로 인구과잉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지구 상의 인구는 넘치고, 과소비와 방출되는 쓰레기는 점점 심각해지며, 한쪽에서는 제대로 먹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앞으로 몇 년 뒤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구가 지닌 원자재에는 한계가
있고,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을 충당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인구 수를 인위적으로라도 줄여 지구를 정화시키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재파이어의 이론은 일견 타당하게도 들린다. 하지만.
학살이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어요.
성경 속에서 노아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신이 내린 홍수라는 형벌을 피해 거친 물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과연 깨끗하기만 했을까. 시작은 산뜻하고 정리된 것처럼 느껴져도 시간이 지난 후 같은 문제가 또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만약 지구가 또 몸살을 앓게 되면 다시 인위적으로 인구의 수를 조정해도 되는 것일까. 확실히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심각하다. 쓰레기 폐기는 국제적으로 문제시되고 있고, 한정된 자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진다.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이 생활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또, 자신 또한 무엇이 해결책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우리는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걸 잃어버렸을지도요.
그래도 난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죽음을 막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드는 거예요.
누군가는 진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으면서 이런 글을 쓰다니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읽고 공포심과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바꿔야겠다 결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그 한 사람이 모여 70억명이 된다면.
이번 작품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 중에서도 색다르다. 챕터마다 반전을 선사하며 놀라움을 안겨준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정신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스릴러를 주로 발표해왔던 것에 비해 스릴러의 형시을 빌려 사회적인 문제를 들춰내고
의식적으로 모른 척 해왔던 범지구적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앞으로 어떤 작품을 발표할 지 이 작가의 행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