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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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들으며 하얗게 밤을 지새우던 때가 있었다. 입시준비를 하던 그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책을 읽거나 문제를 풀었고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때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라식수술을 해서 눈도 제대로 못뜨고 누워있을 때도 라디오를 곁에 두었다. 외출했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라디오를 켜는 일. 낮에 듣는 방송은 낮의 묘미가, 밤에 듣는 방송은 밤의 묘미가 있었다. 그 중에서 애정하는 주파수는 CBS. 천주교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고정해놓은 것은 아니고, 그저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내 취향과 맞았을 뿐이다. 아침에는 팝송, 오전에는 클래식과 영화음악, 정오에는 가요, 오후에는 다시 팝음악과 조금 오래된 노래들, 저녁에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그리고 하루의 끝에 허윤희님의 <꿈과 음악사이에>가 있다.

<꿈과 음악사이에>를 듣게 된 것은 고3 담임을 하면서부터였다. 아침 7시 반 출근, 야자감독까지 마치고 다시 학교를 나서는 시간은 밤 10시.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틀면 꿈결처럼 허윤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의 달콤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피곤을 씻어주었고, 어느 때는 어서 빨리 내려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어야함에도 사연을 듣느라, 음악을 듣느라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추억의 한조각을 차지하는 그녀의 라디오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돌보면서 몇 년간 듣지 못했다. 아이를 재우고 집을 정리하고 나면 어느 새 밤은 깊어있었고, 심신이 지쳐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다 조금 책을 읽다보면 시계는 금방 새벽을 향하는 날들. 깨닫지 못했는데 그리웠나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가 전달해주는 이야기가, 그 라디오 방송이 주던 먹먹함과 설레임과 몽환이.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은 하루의 끝에서 나를 위로해주던 허윤희님의 첫 에세이다. 차마 소개하지 못한 사연들, 그녀의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이 글자의 힘을 빌려 마음 속을 파고든다. 노련한 기교보다는 투박함과 주저함이 느껴지는 글들을 보며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 육아와 고된 일상에 치여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타인의 이야기가 이렇게 힘을 갖게 된 것은 오롯이 그녀의 덕이다.

그날의 나도, 지금의 나도

모두 나지만

어제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오늘의 나는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P32

이 문구를 읽으며 과거의 나를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도 허점투성이면서, 나는 왜 그들에게 그렇게 냉정하고 모질게 굴었을까.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고 칼처럼 잘라내버린 인연들이, 이제와서야 아프게 마음을 때리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금은 쉽게 생각했던 내가 받는 벌은 아닌지, 요즘에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상처주고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직접 미안하다는 말을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꼭 그래보고 싶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난로 앞에 앉아 작은 오렌지 껍질을 짜서

불꽃 위에 끼얹고는

파란 불이 소리 내며 타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걱정할 것 없다 지금까지 써왔다. 지금도 쓸 수 있다.

계속 문장 하나만 쓰는 것이다. "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문장이 나와서

그때부터는 계속 쓸 수 있게 된다.

 

P80. 어니스트 허밍웨이

언제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대문장가의 일화. 생애에 걸쳐 그것을 증명해보인 어니스트 허밍웨이. 그저 첫발을 뗄 뿐.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의 터널 속에서 매일매일 생각하는 것은 '오늘 하루만 잘 지내보자'. 수많은 오늘이 보여 아름다운 날들이 될 거라는 믿음을, 유명작가의 글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가 해온 일들이 틀리지 않았어, 나의 믿음들이 보답받았다는 기쁨.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인정도 때로는 위안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다시 밤에 라디오를 틀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책을 읽는 시간이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받는 것 같아 행복했다. 잊고 있던 기억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성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 앞으로도 정신없는 날들은 반복되고 힘에 겨운 시간들은 계속되겠지만, 나를 나로 있게 해주는 것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짐해본다. 하루의 끝에 라디오가 있다는 기대, 그녀의 목소리로 다시 시작될 밤의 시간들에 마음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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