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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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긴 읽었으나 감상을 잘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이 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서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서, 그럴 때는 저의 부족한 표현 능력이 새삼 원망스럽기도 하고 오히려 리뷰를 남기는 것이 작품에 해가 되지 않을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김숨 작가의 [흐르는 편지]가 그랬어요.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표현하기 쉽지 않은 그런 작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에요. 어느 누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작품을 쉽게 읽고, 쉽게 리뷰를 남길 수 있을까요. 책이 도착해서 읽을 마음의 준비를 하기까지도, 읽어내려가는 것도, 읽고 나서 글을 남기는 것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던 작품입니다.


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일상이라면 축복받아 마땅하지만, 일본군 위안부의 삶을 사는 주인공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 현실을 서술하는 문장으로 작품이 시작됩니다.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그녀는 다른 많은 그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공장에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끌려왔죠. 일본순사들과 친한 사람의 딸은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는 그 곳에서, 열 세 살이면 다 컸다는 말이 그렇게 무서운 말인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수많은 일본군을 받아내면서 폭력 앞에 무기력해지면서도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날들을 꿈꾸는 그녀들이지만, 전쟁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사용한 모든 것이 빚으로 되돌아와 희망 없는 날들이 계속됩니다. 흐르는 강물에 어머니에게 실제로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써내려가는 그녀는 여러 개의 일본 이름을 가진 열다섯 소녀, 금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생적이지 않은 공간, 글에서 느껴지는 역한 냄새들, 이름과 몸에 대한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 상황마저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라 생각하는 고통들이 한꺼번에 밀려와요. 아기를 가진 소녀의 배는 날이 갈수록 불러오고, 아기의 움직임을 느끼는 날들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더욱더 간절히 아기의 죽음을, 아기가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누군가는 총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일본군으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일상.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에 무감해지는 날들 같았던 시간.

 

제가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저는 아기가 죽기를 바랐을까요, 살기를 바랐을까요. 내 목숨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곳에서, 밝은 빛은커녕 공복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곳에서 그래도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랐을까요. 곰돌군을 키우고 있음에도 저는 감히 뭐라 말을 못하겠습니다. 단지 죽기 싫기에 살고 싶어진 소녀, 아무도 죽지 말라며 결국 아기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는 금자를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질 뿐이에요. 겨우 마음이 먹먹해진다는 감상밖에 남길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부족한 감상을 박수현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려 보충하고자 합니다.


단지 눈앞에서 거듭되는 죽음이 살고 싶은 의지를 생성했다. 이 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고결하거나 숭고하다는 형용사를 빼버린 삶 그 자체로서의 삶, 뼈대만 남은 벌거벗은 삶이라 하더라도 살 이유는 충분하다...그들의 생존은 충분히 경이로운 이다...이 소설은 살아남은 그 분들 덕분에 태어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으시고, 또다시 고통의 시간을 살아내어 역사를 증언한 그 분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문학이 그 역할을 오래도록 수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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