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필 책이 좋아서(정세랑, 신연선, 김동신. 북노마드. 2024. 252쪽)

: 책을 좋아해서 책을 업으로 삼은 세 명이 각자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풀어놓는다. 페이지 수가 적어서 편하게 집어들었는데 글자 크기가 어찌나 작고 행간이 좁은지, 할 말이 꽤나 많았구나 싶었다. 저자들은 자신의 직업 자체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출판계 내부 혹은 외부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부당한 관례나 젠더 문제, 문학상 심사나 환경 문제 등, 독자들이 미쳐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나 관심이 미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골고루 건드린다. 나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몰랐던 이야기들을 알게 되어 흥미진진했고, 대부분의 생각들에 동의하며 읽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정세랑 작가가 얘기한 파본에 관한 이야기인데, 작가는 파본을 오염본에 한해서 얘기하고 있다. 나도 오염본에 관한 생각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읽는 데 지장만 없으면 약간의 오염 정도는, 나무를 생각해서라도 사서 볼 의향 있다. 하지만 진짜 파본을 내돈내산했을 때의 짜증을 아는지 묻고 싶다. 같은 페이지가 두 번 인쇄되었거나 누락되었거나 혹은 접혀서 인쇄된 걸 읽는 중간에 발견했을 때의 심정을. 생각보다 은근 자주 있는 일이다.



2. 영원히 알거나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된다(강화길 외. 은행나무. 2023. 264쪽)

: 도시 괴담 앤솔러지. 알라딘 분류는 공포/호러 쪽인데 사실 이게 공포인 건 여성이 아니고서는 체감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작품들이 많았다. 정지돈 외에는 다 재미있었고, 그 중 김멜라 작가와 서정원 작가는 처음 읽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두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더 찾아봐야겠다.



3. 빛의 사슬(칼럼 매캔 역,박찬원. 곰. 2014. 368쪽)

: 작가의 전작이 정말 좋았어서 사놓고 아끼다가 이제야 읽었다. 역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1916년 이스트 강의 수중 지하 터널을 뚫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흑인 청년 네이선 워커는 여러 이민자 출신들과 한 조가 되어 일한다. 그러던 와중 수압 때문에 큰 사고가 일어나고, 네이선의 조원 네 명은 이스트 강 위쪽으로 솟구쳐 오르지만 그 중 아일랜드 출신 콘은 사망한다. 네이선은 콘의 미망인과 유복자녀 엘리너를 자주 찾아간다. 1991년, 트리프로그는 뉴욕의 한 터널 위쪽 들보 위를 편하게 걸어다니며 그곳에서 삶을 이어간다.


생의 이어짐은, 계보는 참 신기하다. 진심은 늘 인종도, 시간도 때로는 공간도 뛰어넘는 법. 네이선의 계보는 아일랜드 계와 아메리칸 원주민과 합해지고 성향은 유전된다. 네이선이 깊이 파고들어갔던 땅 속과 트리프로그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니던 공중의 들보 위는, 어쩌면 맞닿아있는 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트리프로그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PS. 이 책은 이미 절판되긴 했지만, 혹시나 재출간된다면 - 나는 강하게 추천하지만 - 알라딘의 책 소개는 조금 더 생략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의 책 소개는 너무 자세하다, 스포일러 위험.



4. 미세 좌절의 시대(장강명. 문학동네. 2024. 432쪽)

: 우리 사회의 여러 이슈들을 자신만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줏대있게 이야기한 컬럼 모음집이다. 저자의 정치색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많은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사실 진짜 보수는 이런 건데.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라 그냥 기득권자들이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나름 많은 문제들의 솔루션을 제시하려 노력한 점도 좋았다. 물론 완벽할 순 없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



5.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 갑니다(이경. 래빗홀. 2023. 304쪽)

: SF 단편집. 근미래가 배경이지만 현재의 생활과 딱 맞닿아 있다. 아마 앞쪽 여러 작품들은 육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크게 공감할 듯. 육아 뿐 아니라 간병 노동과 가족, 전통 승계 등 작가의 참신하면서도 깊은 시각이 보여 모든 작품을 즐겁게 읽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6. 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진 마모레오,조해나 슈넬러, 김희정 역. 위즈덤하우스2024. 372쪽)

: 저자 중 진 마모레오는 캐나다에서 의료 조력 자살을 실행하는 의사다. 오랜 시간 가정의로 일하던 저자는 2016년 의료 조력 자살이 합법화되자 자신이 해야할 일임을 확신하고 관련 교육을 받아 '마지막 의사'가 된다. 저자는 자신처럼 한 사람의 생활 가까이에서 그를 돌봐온 주치의가 마지막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자신이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그 자신으로 죽을 수 있도록. 저자가 그간 겪어온 많은 사례들을 동의를 얻어 상세히 소개해 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따뜻한 마음과 의료 조력 자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대부분의 사례들은 저자의 확고하고 따뜻한 시선 아래 나름 좋은 엔딩을 맞이하지만, 실라의 사례는 안타까웠다. 제도와 주변 때문에 시기를 놓쳐 자신을 잃고야 말았던.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사례이기도 하고,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같은 사례가 의료 조력 자살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꼭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례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난 정말 중요한 건 당사자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톰의 경우처럼. 톰은 저자가 말했듯, 곁에 누군가가 계속 있어줄 수 있었다면 의료 조력 자살을 신청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톰의 마지막이 행복할 수 있었던 건 톰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톰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난 정말로, 세계의 이런 여러 사례들을 정책 결정자들이 계속 모니터링하고 고민해서, 우리나라에도 합리적이고 수용 가능한 의료 조력 자살이 빨리 합법화됐으면 좋겠다. 



7. 치즈(빌렘 엘스호트, 금경숙 역. 휴머니스트. 2023. 156쪽)

: 라르만스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형의 친구인 판스혼베커를 알게 되어 그의 모임에 나가는데, 평범한 회사원이면서 큰 존재감도 없는 그는 모임에서도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판스혼베커는 그의 허영심을 부추기면서 치즈 수입업을 제안하고, 판스혼베커의 소개를 받아 라르만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치즈 수입업에 덥석 뛰어들어 엄청난 양의 치즈를 들여오기에 이른다.


라르만스의 행보를 조마조마해 하며 읽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재밌었다. 가장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가족구성원들의 생활도 흔들리는 소시민의 삶이 꽤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다행히 해피엔딩. 유쾌하면서도 깔끔한 이야기여서 즐겁게 읽었다.



8.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유성환 역. 휴머니스트. 2024. 296쪽)

: '국내 최초 고대 이집트어 원전 완역본'이라길래 얼른 집어들었다. 난 중역 안 좋아한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기왕이면 저자가 쓴 언어에서 바로 우리말로 옮겨줬음 좋겠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역자의 서문부터 흥미진진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게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잖아. 사실 완전 최초는 아니다(본문에 나온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읽는데 꽤 걸렸다. 주석이 반 이상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행간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2챕터인 길라잡이를 먼저 읽은 게 도움이 됐다. 영웅 설화의 공식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읽었다. 죽을 위기는 없었지만 떠남 - 모험 - 귀환의 공식은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을 계기로 장대한 이집트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아주 약간의 상식이 늘어난 기분.



9. 시간이 멈추는 찻집(TJ 클룬,이은선 역. 든. 2023. 564쪽)

: 로펌 수장인 월리스. 업계에서 손꼽히는 그는 자신의 냉철하고 정확한 성격이 자랑스럽다. 이날도 실수한 직원을 가차없이 해고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야근을 했는데, 눈떠보니 자신의 장례식장. 참석자는 겨우 다섯 명이고, 아무리 소리를 치고 난리를 부려도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구석에 있던 특이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처음 보는 여자만이 자신을 알아본다. 사신 메이. 메이를 따라 '카론의 나루터' 찻집으로 온 월리스는 '사공' 휴고를 만나고 차 한잔을 대접받는다.


내가 원하는 사후세계는 아니다. 찻집 안에 머무는 한 유령으로서 꽤 잘 살 수 있다니. 난 죽음 후 아무것도 없길 바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사후세계일 거 같다. 설정이 새로울 것도 없고 줄거리도 익숙하게 풀려나간다. 심지어는 결말까지 아주 꽉 닫힌 해피엔딩이다(약간의 어거지가 있긴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사랑이다.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 유령 넬슨의 사랑과 반려견 아폴로의 사랑, 아이를 잃은 낸시의 사랑 그리고 휴고의 사랑. 누군가를 잃었을 때 무너지는 건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걸 다독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10. 잘못 걸려온 전화(아고타 크리스토프,용경식 역. 까치. 2023. 150쪽)

: 짧은 소설집. 저자의 날카로운 시각과 재치가 반짝인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죽음과 삶, 이별과 사랑, 사랑과 포기의 이야기들이 잘 압축되어 있다. 이 저자는 늘 읽어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에 쥐어지지가 않았는데 일단 이렇게 워밍업해서 좋았다. 장편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고. 



11. 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조엘 디케르, 윤진 역. 문학동네. 2020. 492쪽)

:2차대전 시, 영국 첩보부에서 만든 SOE(Special Operation Executive) 요원으로 양성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버지와 단둘이 파리에 살던 폴에밀(팔)을 중심으로 매력있고 카리스마 있는 키, 최연장자 스타니슬라스, 거구의 힘센 팔롱, 성직자 지망생이었던 클로드, 상류층 출신의 아름다운 로라, 뚱뚱하다는 이유로 그로라고 불리는 고운 맘을 가진 알랭 등. 이들은 모국어가 프랑스어이거나 프랑스어를 모국어만큼 잘 구사하는 사람들로서,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 잠입하여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나는 전쟁 이야기가 싫다. 아니, 전쟁이 싫다. 강한 사람에게 슬픈 선택을 하게 하는 전쟁이,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아들이 아버지보다 앞서게 하는 전쟁이. 전쟁 중엔 독선적이고 오만한 인간이 전사로 죽기도 하고 늘 강하고 바르던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은 간절한 기도가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버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다 한번씩 우편함에 들어 있는 아들의 짧은 엽서가 주는 잠시의 기쁨으로. 그러나 또한 아주 잠깐의 판단 실수가, 우연히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이 비극을 만들기도 하지. 그래서 난 전쟁 이야기가 싫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온전할 수 없는 이 반쪽짜리 해피엔딩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야기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언젠가 또다시 나타날 악마를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가 분명 또다시 나타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인류는 쉽게 잊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와 동상을 세운다. 기억을 돌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돌은 잊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악마는 또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어딘가에 진정한 인간이 있지 않겠는가.(482쪽)”



12. 나의 곰(메리언 엥겔, 최재원 역. 한겨레출판. 2024. 200쪽)

: 역사협회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루. 지하실에서의 자료 분석에 이골이 난 그녀에게 지역유지 캐리 대령의 유산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외딴 섬에 위치한 대령의 저택으로 가 서재를 조사를 하기로 한 그녀는 그 저택에 오랫동안 사육해 온 곰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주의사항을 듣는다. 혼자 저택에 머물며 점차 곰에게 익숙해지고 자신의 존재를 곰에게 각인시키는 루.


(어쩌면 스포)


이 작품을 읽으며 뒷표지에 강화길 작가의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추천사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루는 인간 남성들과의 사랑에서 늘 상처받아왔고, 그 누구도 그녀를 곰 만큼 배려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곰과의 사랑이 위험함을, 자신의 환상을 덧씌운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마지막이 그렇게 덤덤하게 마무리됐겠지. 그럼에도 그녀가 곰과의 성애를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난 이게 사랑이 맞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녀 자신에 대한 사랑. 가장 근원적이면서 모든 사랑의 시작인 자기애.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주기는커녕 마음과 몸을 이용하기만 했던 인간 남성들에게서 훨씬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자신을 향한 사랑. 곰은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다. 깨달은 루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13. 살라메아 시장(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김선욱 역. 지만지드라마. 2024. 234쪽)

: 작은 농촌 마을에 지나던 군대가 머물게 된다. 부농 크레스포는 대위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면서 장성한 딸 이사벨라와 그녀의 사촌을 숨게 한다. 군인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대위는 이미 그녀를 보았고, 어떻게든 그녀를 얻고자 한다. 그리고 대위의 욕정은 결국 이사벨라의 명예를 더럽힌다. 분노한 크레스포는 시장이 되어 직접 대위를 잡아들인다.


처음엔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 - 계급을 뛰어넘는 - 인 줄 알았는데 이사벨라가 당하는 걸 보고 혈압이 확 치솟았다. 당시의 철저한 계급의식에도 불구하고 평민에게도 명예는 중요했으며 이 작품은 그걸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하지 않지. 17세기 작품이라 기대도 안 했지만. 결말은 꽤 현실적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짜잔~을 기대했지만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



14. 이탈리아 인 1. 2(앤 래드클리프, 류혜원 역.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550쪽. 364쪽)

: 시칠리아의 공작가 아들 빈첸티오는 교회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엘레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노약한 이모와 단둘이 소박하고 단출하게 사는 그녀를 부모가 반대할 것을 알지만 계속 그녀에게 다가가던 빈첸티오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경고하는 수도사 복장의 존재와 맞닥뜨리고, 그를 뒤쫓지만 잡지 못한다. 그 존재는 엘레나 이모의 죽음도 경고하는데,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한 빈첸티오는 어머니의 고해신부를 의심하지만 계략적이고 잔인한 그는 빈첸티오의 유도심문에 넘어오지 않는다. 한편 이모를 잃은 엘레나는 친분이 있는 수녀원에 잠시 몸을 의탁하기로 하지만 괴한들에 의해 엉뚱한 수녀원으로 끌려간다.


신비주의를 은근히 좋아하지만 이 작가는 늘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준다. 하지만 그 설명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분위기는 무엇보다 신비롭고 은근하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 출생의 비밀과 음모, 교조주의에 대한 반감과 종교 재판소의 위상, 재판 모습 등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해피엔딩을 기대하긴 했지만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했는데 어찌보면 전형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빌런들의 죽음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었기에 꽤 즐거웠다. 



15.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아서 코난 도일. 남궁진 엮,역. 센텐스. 2024. 244쪽)

: 국내 초역된 아서 코난 도일의 선상 단편 10개. 앞 6개는 바다 관련 미스터리, 뒤 4개는 해적 샤키 선장 시리즈다. 기대가 컸는데 솔직히 셜록 홈즈 시리즈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범죄보다는 미스터리에 방점이 찍힌 작품들로, 만약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기 전에 읽었더라면 이것 자체로 엄청 흥미진진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떡해, 이미 기대치가 커져버린 걸. 게다가 샤키 선장은, 글 속에서는 엄청 사랑받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내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 자체는 괜찮았다. 처음 알려졌을 땐 세상 복잡하고 답이 없어보였던 미스터리들이 의외로 하나의 실마리만으로 스르륵 풀린다. 확실히 독자들의 흥미를 확 끌 수 있는 서술 방식을 알고 있는 작가이다. 


알려질대로 알려진 작가의 미발표 작품이나 미출간 작품만큼 반가운 건 또 없다. 이런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됐으면 좋겠다.



16. 페이스(이희영. 현대문학. 2024. 192쪽)

: 시울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걸 자각한 건 유치원 때이다. 친구들은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볼 수 있단다. 시울의 눈에 거울에 비치는 건 매일 다르다. 어떤 날은 푸른 안개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기하학적 무늬들의 모음이기도 하다. 안과와 소아정신과를 거치며 시울은 그냥 얼굴이 보인다는 거짓말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제 고등학생이 된 시울. 매일 아침 엄마한테 자신의 얼굴이 어떠냐고 묻는다.


자기 얼굴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거울로 확인할 수 없다는 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여러 면에서 시울이는 꽤 성숙한 면모를 보여준다. 부모님의 마음을, 할머니의 마음을 한 발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시울. 사고로 인해 얼굴에 상처가 생겼을 때에도 묵재를 원망하기보다는 사고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른 자신에 대해 움츠러들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청소년에게 (아니, 어른이라도) 쉽지 않을 텐데, 건강한 멘탈로 주위를 챙기다니. 그리고 마치 모범 답안 같은 결말. 가볍게 집어들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던, 예쁜 이야기였다.


"라미가 자신의 진짜 매력을 모르듯, 사람들이 할머니의 소녀 같은 호기심을 못 보듯, 우리는 어쩌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백지보다 귀퉁이의 작은 얼룩에만 집중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세상은 볼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어 기적처럼 내 얼굴과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정도의 얼굴을 만들어가고 싶다." (172-173쪽)



17.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뷔페(크리스티아나 브랜드, 권도희 역. 엘릭시르. 2023. 600쪽)

: 16편의 미스터리 단편들. 다 흥미진진한 소재들이었으나 번역 때문인지 매끄럽지 못하게 흘러가는 부분들이 있었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을 수도. 추리를 위한 재료가 충분히 제공되지 못하고 갑자기 단서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거야 그 시절 추리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캐릭터의 일관성도 좀 떨어지는 것 같고, 각 인물들의 관계성이 납득하기 힘든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장편을 읽고 판단하고 싶은데, 책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8.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필리프 클로델, 길경선 역. 은행나무. 2024. 248쪽)

: 지중해의 어느 화산섬. 입을 벌린 개 모양의 이 제도 중 본섬의 해안가에 어느날 세 구의 시신이 밀려온다. 아프리카 난민으로 추정되는 이 시신을 처음 발견한 은퇴한 교사는 마침 이곳을 지나던 일꾼에게 시장을 불러오라 말하고, 시장은 함께 있던 친구이자 섬 개발 사업 동업자인 의사와 함께 온다. 여기에 지나던 현역 교사와 신부가 합류하는데, 시장은 섬의 대외적 이미지를 위해 - 사실은 자신의 휴양지 사업을 위해 - 시신을 화산 구덩이에 던져 버리기로 한다. 관련자들은 대부분 수용했지만 현역 교사만은 옳지 않음을 주장한다.


너무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사람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다지만 죽음에 경중이 매겨지는 걸 우리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다. 돈을 위해서, '대의명분'을 위해서 진실이 은폐되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고. 뿐만 아니라 역자의 말에서처럼 위험에 처한 난민들 이야기 뿐 아니라 대중 선동, 가짜 뉴스, 사생활 침해, 공권력 사칭, 냄비 근성 등 많은 이슈들을 짧은 분량 안에서 적절히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결말 또한 뻔하다 생각될 수 있겠지만, 그만큼도 안 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잘 쓴 소설이었다.



19. 자살(에두아르 르베, 한국화 역. 워크룸프레스. 2023. 128쪽)

: 제목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작가와 이 작품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흥미로웠다. 작품은 2인칭으로 '너'의 자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내와 테니스를 치러 나가던 중, 라켓을 두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가 지하실에서 권총을 자신에게 쏜다. 화자는 너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여든다섯에 죽으려고 미리 묘비까지 디자인해 놓은 너, 열일곱 살의 너, 드럼을 연주하기 위해 간 이웃도시에서 길을 걷는 너... 


"너는 내가 원할 때 나에게 말하는 한 권의 책이다. 너의 죽음은 너의 삶을 썼다.(17쪽)" 화자는 너를 회상하며 그리워하고 애도한다. 역자는 어느순간 화자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했지만 난 그 말엔 동의하지 않는다(아마도 역자는 저자와 화자를 너무 동일시했던 듯). 다만 난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너'가 너무도 부러웠다. 그렇게 세세하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다니. 저자가 원했던 건 어쩌면 나와 같을 지도...



20. 별보다도 빛나는(김준녕. 채륜서. 2023. 292쪽)

: 2400년대, 지구 이주민들이 정착한 여름성. 이곳에는 다이아몬드 비가 내린다. 처음에는 지구에서 좋아라하며 수집해 갔지만 곧 우주 어디에나 흔한 탄소 덩어리로 전락한다. 오히려 날카로운 다이아몬드 비가 내릴 땐 경보가 울리고 사람들은 다 피하기 바쁘다. 은하는 할머니와 둘이 산다. 뛰어난 우주 배달부였던 부모님은 일을 하다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에 갇혀 버렸다. 은하를 키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할머니는 이제 몸이 많이 상했고 결국 치매까지 오기에 이르렀다. 은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물류 센터에서 일하며, 부모님을 찾기 위해 배달 트럭(우주선)에 몰래 탑승해서 블랙홀을 지날 때마다 이상 신호를 감지하려 애쓴다. 결국 할머니는 사람들이 멸시하는, 기계몸에 정신만 이식하는 휴봇이 되기에 이르렀고, 어느날 엄마가 구출됐다는 소식을 받는다.


계속 울었다. 할머니 때문에. 이민 1세대로 어렵게 딸을 키워내고, 딸을 잃고, 딸의 딸을 키워내고, 자신을 잃은 할머니. 난 한번도 양쪽 할머니에게 '가장 예뻐하는 손주'였던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앞으로 누군가의 할머니가 될 일은 없겠지만 은하의 할머니 때문에 계속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이 모든 짐을 짊어진 은하도 가여웠다. 하지만 은하의 해피엔딩은 기대할 수 있었지만 할머니의 마지막은... 그래서 이 책의 결말이 해피하다고 차마 못하겠다. 분명 희망적이기는 하다. 앞으로 조금은 나아지겠지. 휴봇에 대한 차별도, 가난도. 그러나 갚을 길 없는 희생 위에 세워진 삶이란...



21. 결핍으로 달콤하게(에밀리 디킨슨, 박서영 역. 민음사. 2023. 320쪽)

: 은둔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서간집이다. 시인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몇몇에게 보낸 서신들을 인물별, 시간별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모든 서신이 다 있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각 챕터의 앞에 해당 인물에 대해 설명이 있어서 읽는데 큰 도움이 됐다. 소실이 된 부분도 있고 모든 서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짐작하기는 쉽지 않으나 점차 침잠해 가는 그녀의 심정을, 시에 대한 애정과 겸손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애틋함을 읽을 수 있다. 


원래 남의 편지 읽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당사자들이 아니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워낙 좋아하는 시인이어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해 보고 싶어서 읽었고, 좋았다. 



22.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2(조엘 디케르, 양영란 역. 밝은세상. 2024, 592쪽, 508쪽)

: 첫 소설을 대박친 작가 마커스 골드만은 명성에 따르는 즐거움도 잠시, 곧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린다. 글을 전혀 쓸 수 없어 갖은 방법을 써보지만 소설은 한 줄도 진행되지 못하고, 출판사와의 계약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마커스는 대학 은사인 해리 쿼버트에게 전화를 하고, 그의 집으로 간다. 해리의 집은 작은 도시 오로라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구즈코브. 그곳에 머물며 노력을 하지만 백지 공포증은 나아지질 않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작가로서의 모든 걸 포기하려던 중, 해리의 집 마당에서 해리의 역작 『악의 기원』원고와 함께 33년 전 실종된 열 일곱살 소녀 놀라 켈리건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뜨고, 해리가 용의자로 체포된다. 해리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고 마커스는 구즈코브로 달려간다.


역시 재밌다. 작가의 필력을 알기에, 그리고 범인이 예상치 못한 인간일 거라는 짐작으로 찬찬히 읽었다. 2권에서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난 이 작가가 범죄를 설계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고찰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거라서 흐린 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글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었어. 살아보니 인생은 대체로 무의미해.(160쪽)"라고 해리는 말했지만 글쎄, 인생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건 글쓰기가 아니라 사랑 아닐까. 



23.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요나스 하센 케미리, 홍재웅 역. 민음사. 2024. 156쪽)

: 아모르는 밤새 나이트클럽에 있다가 새벽에 나왔는데, 친구 샤비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다. 시내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것. 아랍계인 아모르는 계속 형제들(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고 받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닌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신 또한 의식하는 타인들. 


(스포)


처음 읽을 땐 아모르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각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제들에게 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하지만 이 작품은 테러리스트의 사후 활동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테러리스트와 가장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내야 하는 시선들과 그 시선을 의식하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시선의 압박으로 인해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마저 착각하게 되는 화자의 이야기. 저자는 뛰어난 글솜씨로 독자를 화자에게 몰입하게 한다. 아모르가 경찰에게서 무사히 멀어졌을 때 안도할 만큼.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이른바 '주류 사회'에 진입할 수 없는 이방인의 일상을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에서 마주치는 나의 어설픈 이해가,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날카롭지는 않은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이른바 ‘주류 사회‘에 진입할 수 없는 이방인의 일상을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에서 마주치는 나의 어설픈 이해가,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날카롭지는 않은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핍으로 달콤하게 - 에밀리 디킨슨 서간집 인문학 클래식 8
에밀리 디킨슨 지음, 박서영 옮김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실이 된 부분도 있고 모든 서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짐작하기는 쉽지 않으나 점차 침잠해 가는 그녀의 심정을, 시에 대한 애정과 겸손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애틋함을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보다도 빛나는
김준녕 지음 / 채륜서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결말이 해피하다고 차마 못하겠다. 분명 희망적이기는 하다. 앞으로 조금은 나아지겠지. 휴봇에 대한 차별도, 가난도. 그러나 갚을 길 없는 희생 위에 세워진 삶이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살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는 내가 원할 때 나에게 말하는 한 권의 책이다. 너의 죽음은 너의 삶을 썼다.(17쪽)" 화자는 너를 회상하며 그리워하고 애도한다. 난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너‘가 너무도 부러웠다. 그렇게 세세하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