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우유 - 그리움으로 찾아낸 50가지 음식의 기억
김주현 지음 / 앨리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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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가을비가 제법 힘 있게 창을 두드린다. 

2013년 9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맞으며, 가을비에 젖어드는 이 밤,

아빠는 낚시를 하러 친구 몇 분과 바닷가에 가셨고,

엄마는 "아빠 없으니까 잠이 안 오네" 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고 계시고,

언니는 큰딸 작은딸 소식을 연방 카톡으로 전해오고 있고,

여동생은 얼마 전에 태어난 셋째 아들이 아무래도 원빈을 닮았다며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고,

남동생은 친구들과 논다며 큼직한 가방을 둘러메고 나갔고,

몽은 얼마 전에 사준 '마약방석'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고,

나는, 노란 책 한 권이 불러온 상념에 잠겨 있다가,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 그대와 나의 '3층집', 그리고 '사남매' 이야기

 

이십여 년 전 그 옥탑 집에 살 때 계셨던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지 십 년이 가까워오고,

많은 가족 구성원이 새로이 생겨났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아빠 엄마 언니 나 여동생 남동생, 일곱 명입니다."

일곱 가족의 이야기는, 그때 그 시절 속에 남겨둔 채, 이제는 '그리움'과 '추억'으로만 아련하다.

 

문득, 그 옥탑 집을 떠올리게 한 것은, 노란빛 바나나 우유였다.

빙그레 웃으며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바나나맛 우유'가 아니라, 음식 잡지 기자 김주현이 쓴 책, 『바나나 우유』.

 

그 유년의 시간 한복판에는 지상의 방 한 칸, 3층집이 있다. _ 82

 

저자의 '3층집' 이야기가 불러온, 내 유년의 3층(이랄지 옥상이랄지)에서의 그 시절.

1층은 식당, 2층은 여인숙이 있던 건물의 옥상을 빌려(?), 아버지가 손수 만들었다던 그 집.

놀랍게도, 나의 그 시절 이야기를 꼭 닮은 이야기가 이 책 속에 펼쳐져 있었다.

3층(이랄까 옥상이랄까)집에서 뛰놀고 뒹굴고 치고받고 먹고 자고 사랑하고 웃고 울고 떠들며 자라나던 우리 4남매의 이야기를 쏙 빼닮은 이야기.

그리하여 절로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흘러들게 된 나.

 

'그리움으로 찾아낸 50가지 음식의 기억'이 담긴 이 책은 짐작도 못 했으리라.

여기 한 독자는,

음식에 앞서 '3층집'과 '사남매' 이야기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그 시절의 '옥탑 집'으로 돌아가 눈물 한방울 또로록 해야 했음을...

 

지금 돌이켜보면 참 허름했던 집, 참 궁색한 살림살이였는데

가난은 우리를 할퀴고 가지 못했다.

아마도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바람막이가 돼주신 엄마,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_ p.86

 

 

 

#.  할머니와 '달구나' 한 냄비

 

'달구나'를 유난히 좋아하던 우리들을 위해 할머니는 어느 날, 냄비에 설탕을 잔뜩 부어 녹여서는 달구나를 한 국자도 아닌 '한 냄비' 만들어주셨다.

그날 그 달구나를 정말 말끔히 싹싹 다 먹었던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내 생에 가장 통 큰 '음식'으로 내 마음속에 위풍당당 자리잡고 있다.

나는 아직도 달구나(혹은 달고나, 혹은 뽑기, 혹은 쪽자, 혹은 국자, 혹은 띠기 등등으로 불리는 듯한 그것)를 몹시 좋아해서,

지나가다 별이며 하트를 찍어주는 뽑기 장수 아주머니 아저씨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얼굴 벌게지도록 열탕 같은 하루를 보낸 날이면

지금도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살이 홀라당 벗겨질 것 같아도, 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가는 거다,

눈에 비누 거품이 들어간 것처럼 괴로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갈 거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_ p.6

 

저자가 열탕 같은 일상에 지치면 찾는다는 바나나 우유,와 같은 존재가 내게는 어쩌면 달구나인지도 모르겠다.

꼭 달구나가 아니어도 달달한 믹스커피나 초콜릿처럼 일단 단 것들이면 오케이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보는 순간부터 환호작약하여 단숨에 '열탕'의 온기를 낮춰주는 존재는, 달구나가 최고다.

 

빙그레 웃는 날보다, '앗 뜨거!' 세상에 데이며 삶기며 튀겨지며 살아가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다시 아자아자 용기를 내게 해주는 힘,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내 온몸이 절로 싱긋이 웃을 수 있는 작은 '맛' 하나로도 충분한지도.

 

 

 

 

 

 

 

# 사는 게 쉽지 않은 날 위로의 '음식'이 되어주는 문장들

 

 

정말 누구에게나 삶은 쉽지 않은 걸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아마 나도 모르게 어두컴컴한 시간들을 지나갔다는 거겠지. 무엇이든 쉬워 보이는 그들의 인생에도 어딘가 터널이 있었다는 얘기일 거다.

 

그렇다면 조금 위로가 된다. 한 번도 막막하고 무서운 터널을 지나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내게 너무 먼 사람들이니까. _ 78

 

 

풋.

'처음 나온' '덜 읽은' '깊지 않은'

풋사랑, 풋과일, 풋콩, 풋잠……

떫고, 시고, 그러나 싱그럽고 풋풋한 것들.

여물지 않아서, 너무 깊지 않아서

그 '어설픔'이 예쁜 것들.

 

세월이 지나면 다시 못 올 '풋것'의 시간들, 색깔들, 냄새들.

 

풋내 나는 시간들. 그 풋내를 즐겨. 다시 못 올 시간들이니까. _ 117

 

 

사소한 하루를 살아가는 나는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사소한 일에 설레며

사소한 일에 마음 무너지고

사소한 일에 눈물 닦는다.

 

나는 무수한 사소함으로 살아간다.

 

나무를 버티게 해주는 잔뿌리들처럼. 그런 사소함으로.

 

나를 견디게 해주고 나를 버티게 해주는 사소함들에게 인사한다. _ 267

 

 

아마도 당신이 사는 동안 만나고

사귐을 나눈 사람들 속에 새긴 구절 속에서야

당신이 얼마나 근사했던 사람인지,

당신이 얼마나 포근했던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내 삶의 한 구절을 새기며 산다.

사람은 사람에게 기억되니까, 사람은 사람에 의해 지워지니까.

한 생을 여행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에 새기는 비문,

어떤 문장을 새기며 살아가고 있을까. _ 277

 

 

 

 

#. 그리고,

 

할머니의 홍시, 아빠의 배, 엄마의 단감, 언니의 자몽, 나의 자두, 여동생의 복숭아, 남동생의 곶감.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았던,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 그 중에서 과일.

이 과일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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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 새우를 잡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그가 다시 한숨을 몰아쉬고 나서 말했다.

  "밤하늘에 그물을 풀어 별들을 무더기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지. 운이 좋으면 가끔 달도 걸려들고."

  흠, 그래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로구나.

  "바다는 언제나 고독한 계절이지. 별이 쏟아지는 밤에 배 위에 누워 있으면, 바다와 하늘의 구분 따위는 곧 사라지지. 그러니까 나는 배를 타고 하늘 어딘가에 떠 있거나, 바다 어딘가에 떠 있거나…… 흐흐."

 

 

_ 윤대녕 「반달」

 

 

 

 

 

 

 

 

 

 

 

 

 

 

 

 

 

 

도자기 박물관에 갔다가, 반달을 만났어요.

오랜만에,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맑디맑은 동요를 흥얼거리며...

 

 

추석 언저리에는,

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생각하고 기다리고 바라보는데,

이번 추석에는 반달이 몹시도 그리웠답니다.

(실은, 그래서, 추석날 저녁에 만난 '슈퍼문'급의 보름달 보면서도 쬐끔 덜 반가워했어요. 보름달, 미안~! ^^;;)

 

 

 

  "반달이로구나. 부엌칼로 무를 썰어놓은 듯 깨끗하고 하얗게 떠 있구나."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조금(小潮)의 바다. 그래서 바다가 움직임을 멈춘 채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하얀 쪽배란 말이 정말 딱 어울리는구나."

  나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의 무리가 성운을 이뤄 강처럼 하얗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숨이 멎었다. 무심결에 어머니가 읊조리고 있는 동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어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자니 유년의 서글픈 꿈들이 하나씩 되살아나면서 금세 덧없이 사라져갔다.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_ 윤대녕 「반달」

 

 

 

부엌칼로 무를 썰어놓은 듯, 하얀 쪽배를 꼭 닮은, 반달.

그 반달에 온통 마음을 사로잡혔답니다.

 

소설에서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 새우를 잡는" 느낌을, "밤하늘에 그물을 풀어 별들을 무더기로 끌어당기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밤하늘에 그물을 풀어 별들을 무더기로 끌어당겨본 적은 없지만(^^; 누군들 있으랴만은...), 왠지 그 느낌을 알 것 같았어요.

「반달」을 읽은 제 마음도, 꼭 그런 느낌인 것 같았거든요.

 

무언가 총총하고도 은은한 기운으로 제 가슴을 충만하게 한, 반달.

그 여운이 참으로 짙습니다...!

 

 

언젠가 꼬옥, 서늘한 밤바다 앞에 서서,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가는 그 하얀 쪽배를 바라보고 싶어요.

 

 

 

 

 

 

삶의 길을 잃고 헤매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덧없는 꿈이니 고독한 환상이니 화염 같은 고통이니 하는 말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길을 잃었었기 때문에

어쩌면 사랑이 가능했고 가까스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_ 윤대녕 「반달」

 

 

 

 

 

 

 

 

 

 

 

 

 

 

 

 

 

 

 

 

 

반달은_아니지만_은하수도_아니지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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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코미디
윌리엄 사로얀 지음, 정회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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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래, 이 책은, 선하고 선했다. 

요즘 한없이 악해질 일밖에 없는 것 같던 내 마음을,

책을 읽는 순간만큼이라도 선하게 선하게, 어루만져준,  이 고마운 책.

이 책을 읽고서 나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예쁘게 살자...' 마음 먹었다.

그것이, 내 마음을 선하게 선하게 다독여준 이 책에 대한, 이 책을 만나게 해준 내 삶에 대한, 나의 작은 보답...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도시 이타카에 살고 있는 매콜리 가족, 그 가족과 일상을 나누는 이웃, 친구, 동료 들.

이 선량한 이웃들을 내 마음에 담았다.

단지 악인이 등장하지 않아서 착한 소설...? 그건 아닐테지. (아, 나름대로 '악인'도 있었네. 있긴 있었네. 선함의 오라가 커서 잊었나보다...)

읽어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어떻게 읽는 이의 마음을 선하게 선하게 매만져주는지...

읽고 나서 마음이 이렇게 잔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책,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슬픔이 지나갔는데도, 커다란 위기도 분명 있었음에도, 눈물 또한 흘렸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이 책의 등장인물들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네 살 꼬맹이 율리시스의 눈으로 보는 너무나 아름답고 신기하고 경이로운 세상을,

내가 진심을 다해 나눌 수만 있다면...!

 

"율리시스는 모든 사람을 좋아해. 아마 이 세상 사람들을 다 좋아할 거다."

"맞아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특히 마커스 형을 좋아하더라구요. 저는 그 이유를 알아요. 지금은 군대에 있지만 마커스 형에게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린아이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어린아이 같은 면을 찾거든요. 만일 어떤 어른에게서 그런 면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좋아하게 되죠. 저는 율리시스 같은 아이다움을 간직한 어른이 되고 싶어요." (205~206)

 

나는 율리시스가 '더 많이' 좋아하게 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이미, 늦었겠지만... '동심'도 재발굴이 되는가...?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다만...)

네 살 꼬맹이 율리시스처럼, 이 세상이 온통 신비롭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서른네 살 꼬맹이가 되고 싶다... 그래서 너에게 사랑 받고 싶다.

 

 

 

 

_ 기차가 완전히 사라진 뒤 율리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쓸쓸한 삶, 잡초가 무성한 데다 어딘지 이상하고 쓸모없는 것들이 넘쳐나며 별 의미는 없지만 경이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 잠시 후, 율리시스의 얼굴에는 매콜리 집안 사람들 특유의 온화하고 지혜로우며 비밀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한 인사이기도 했다. (11)

 

 

_ "뒤쥐는 이 땅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란다. 말하자면 뒤쥐는 우리의 일부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일부인 셈이지." (27)

 

 

_ "네게는 모든 게 다 변한 것처럼 느껴질 거야. 하지만 사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네가 외롭다고 느끼는 건 더이상 네가 어린애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이 세상은 원래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 (42)

 

 

_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게 된다면…… 우리가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죽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139)

 

 

_ 저는 학교에서 우스갯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모든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판국이니 제가 가끔 우스갯소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150)

 

 

_ "톰, 난 술 마시면 안 돼."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죠. 가끔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어요. 그러니 어서 가서 마음 편히 한잔 드세요." (155)

 

 

_ 저는 어른이 되면 절대로 울 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인간은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때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게 되니까요. (200)

 

 

_ 인간은 뉴스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문을 팔아 푼돈을 버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해도 되는 일일까? 인류가 날마나 저지르는 실수를 기쁜 소식이라도 되는 듯 큰 소리로 알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 사람들은 날마다 발생하는 새로운 범죄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234)

 

 

_ 뭐든 사람들과 관련된 일은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네가 볼 때 확실히 틀린 것이라도 결코 확신해선 안 돼. 만일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단다. 이런 말을 한다고 섭섭해하진 마라. 나는 너를 존중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을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단다. 사람이란 눈 감을 때가 가까워지면 자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갈 이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마련이지. 내 말 이해하겠니? (257)

 

 

_ 나는 누구도 진짜 나의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결코 내게 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나에게 사람들은 모두 친구야. 나의 전투 상대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불운하게도 갖게 된 어느 한 부분이지. 나는 우선 내게도 그런 부분이 있지 않은지 찾아본단다. (260)

 

 

 

 

*.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너무 사랑스럽고 뭉클했던 것이, 책의 앞장에 쓰인 '헌사'이다.

윌리엄 사로얀이 '타쿠히 사로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타쿠히 사로얀'은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사로얀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의 아버지도 역시 작가였다.

허나, 아버지의 언어(아르메니아어)와 아들의 언어(영어)가 같지 않아, 누군가가 이 책을 아버지의 언어로 번역해주길 바라는, 헌사의 내용이, 몹시도 뭉클.

 

"저는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훌륭한 누군가가 이 소설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출간하여 당신이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영문판보다는 아르메니아어 번역판으로 읽는 편이 좀더 수월할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제가 쓴 것이지만 당신은 예전처럼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이 작품의 일부를 제게 읽어주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귀 기울여 듣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 가치를 당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 이 이야기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 작품이 당신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당신과 우리 가족의 특징인 유쾌함에 진지함을 적절히 섞어 최대한 단순하게 쓰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흡족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저도 알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는 당신의 아들이 당신에게 바치기 위해 쓴 것이고, 따라서 그 이유만으로도 당신에게는 흡족한 작품일 것입니다."

 

이 책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어 나왔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충분히 아들의 이 책을 읽고, 흡족해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곁에서 함께 읽은 '이방인'인 내 마음마저도 흡족했으니 말이다.

 

 

 

 

선했고, 흡족했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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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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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인생, 글쓰기, 추리. 이 네 가지가 너무나 맛있게 버무려진 소설이었어요! 개콘에서 `네가지` 참 좋아했는데, 이 책의 `네가지`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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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3 - 휴가 ㅣ 어떤 날 3
김소연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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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메신저에 '오프라인'이 제법 보였다. 휴가철이었다.

지금껏 프리랜서로 지내며 따로 '휴가철' '휴가'라는 걸 챙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가철'이 영 낯설다.

평소에는 출근길에 훌쩍 눈에 띄는 지하철 역에 내려 달아나 보고 싶기도 하고,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기 위해 출근을 포기하고 '반차'를 쓰고 싶기도 하고 그렇더니, 막상 정정당당하게 '달아나도' 되는 휴가 앞에서, 어리둥절. (역시, 멍석 깔아주면...)

누가 휴가 안 가느냐고 물어도, 딱히 갈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고, 어쩌고 할 뿐, 휴가 계획도 없다.

아, 휴가인데... 처음으로 내 앞으로 주어진 '휴가철'을 맞았는데...!

 

이 책에 박연준 시인이 쓴 것처럼,

"우연히 한 다발의 돈을 얻은 가난뱅이가 돈 쓰는 방법을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지나가는 좀도둑에게 돈을 몽땅 빼앗긴 꼴과 같"아진 심정이라니!

 

그렇게 내 앞에 주어진 휴가철에 속수무책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어떤 날』 3권이 나왔다. 이번 호의 테마는, '휴가休暇'.

깔아 놓은 멍석 앞에서 멍 때리고 있는 내 마음에, 이 책을 처방한다.

 

 

 

휴가는 행복을 더이상 유예시키지 않아도 되며, 지금 이 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다. 나의 오늘이 어제와 분명히 다름을 선언하고, 비로소 내 의지대로 주어진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더이상 보이지 않는 도둑에게 귀한 것들을 빼앗긴 채 찡그리고 살 순 없다. 휴가는 '인생'이란 큰 덩어리에 갈라진 틈, 어떤 '사이'에 도착하는 것이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목적의식 없이 순간 속에 자연스럽게 머물거나 스밀 수 있다. 쉬자. 주먹을 펴고, 욕심과 걱정에서 놓여나자. 나는 가벼워지고 내 삶은 더 말랑하고 행복해지리라. 

 

_ 박연준 '보이지 않는 도둑이 훔쳐간 것들'

 

 

// 이번 호에서도 내 마음을 '훔쳐간' 박연준 시인의 글!

(『어떤 날』을 1호부터 3호까지 꾸준히 챙겨 보고 있는 애독자로서, 박연준 시인의 글, 특히나 반갑고 참 고맙다.)

내 마음을 훔쳐간 박연준 시인의 문장이 어디 이뿐인가?

 

 

내가 도둑맞은 게 어디 이뿐인가? 내 2013년의 시작은 어디로 갔을까? 호기로운 다짐들, 신나게 계획했던 여행들은? 나이가 들수록 오늘이 어제 같고, 올해가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제와 오늘이 완전히 새로운 날이란 사실, 오늘은 내가 '생전 처음 겪는 하루'란 사실을 잊고 산다. 어떻게 이런 자명한 사실을 눈뜬장님처럼 못 보고 살았을까?

 

_ 박연준 '보이지 않는 도둑이 훔쳐간 것들'

 

 

 

// 이 책을 읽으며 '휴가'를 엄청 갈망하며 '나도 당장 휴가 갈 테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 마음은 우선 뒷일이고,

책 속 문장들에 빠져들어, 이 책과 보낸 시간 시간이 그냥 휴가 같았다. 제대로, 북캉스.

 

그래도 이런 문장들에는, 앉은 그 자리에서 짐 꾸리고 싶어져 마음이 마구 간질간질해지지... 

 

 

문득 작은 도발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출근을 하다가 문득 핸들을 돌려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진다든지, 친구를 만났다가 그 길로 같이 춘천 가는 기차를 탄다든지, 밤하늘이 예뻐서 이름 모를 시골로 무작정 향한다든지……. 하지만 그건 늘 공상에 그치고 만다. 마음속으로만 '언젠가' 저지르고 말 거라고 다짐만 하고 살아온 인생이다. 하지만 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저지르지 않는 한 '언젠가'는 내 머릿속에만 있을 뿐,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떠나기로 했다. 

 

_ 위서현 '푸른 곳에 마음 풀다'

 

 

// 다들 작은 도발을 꿈꾸며 살겠지...?

누군가는 저지르지 않고 '언젠가는...'만 되뇌고, 누군가는 문득 '떠나기로' 한다.

이 도발적인 떠남이, 참 매력적이다.

 

휴가철 앞에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고 했지만,

나도 세워둔 여행 계획은 있다. 10월의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될 나의 대만...!

대만 여행 계획하고 비행기 티켓과 숙소 예약을 하고 참 들떴는데, 갑자기 '계획'이라는 한 고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도발'처럼, '일탈'처럼,

문득 떠나고 싶었던 거다.

 

그냥 아무 때고, '오늘은 휴가를 내겠어요~' 하고 훌쩍, 나만의 휴가를 즐기러 떠나고 싶었던 거다.

이 책은 내 마음에 '휴가'를 심어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도발', '일탈' 을 더 크게 심어주었다.

앞으로도 정해진 휴가철에 계획을 세워 어딘가로 떠나기 보다는 문득, 불현듯, 갑자기, 홀연히, 그렇게 회사 메신저를 '오프라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떠나겠다... (응? 무슨, 선전포고 하듯이...;;)

 

 

 

// 어떤 날, 어떤 문장.

 

 

 

다녀오면 후유증으로 현실이 더 빠듯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일탈을 꿈꾸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어딘가로 떠날 이들의 설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운인 것 같다.

 

_ 박세연 「휴가」

 

 

문득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어. 뭉개진 발끝으로 거대한 몸뚱어리를 이끌고 저기에서 여기로 걸어 나오는 것.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이동하는 것. 그게 오늘을 살아 견디는 일이 아닐까? 이 땅 위에 꼿꼿하게 걸어가. 살아, 살아가. 그 발이 감동스러워. 이 몸뚱이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일렁여 눈시울이 뜨거워져.

 

_ 김민채 「동경東京」

 

 

살다보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할 때가 있다. 갑자기 모든 게 끝나버린 것 같아서 절망스러울 때도 있고, 때로는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순간이 남김없이 나의 삶이라는 사실이다. 멈춰 있는 시간도 소중한 삶의 순간들이고, 주저앉아 있는 동안도 똑같이 귀중한 내 삶의 순간들이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아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들이 어쩌면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방황하고 부유하는 그 시간들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_ 위서현 「푸른 곳에 마음 풀다」

 

 

모든 여행자란 어느 순간에도 아름다운 존재다.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그대의 용기란 언제나 근사하니까. 길 위에 선 우리라 아름다우니까……. 삶이라는 길 위의 모든 여행자에게 브라보!

 

_ 위서현 「푸른 곳에 마음 풀다」

 

 

슬픔과 눈물은 가끔씩이라도 소모해야 좋다는 생각이다.

슬픔과 눈물이 쌓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기 전에 미리 덜어내고 운 다음 볕에 잘 말려 뽀송하게 살펴주어야 한다. 성가시지만 마음이란 게, 그렇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우는 거다. 휴가의 다른 말이 힐링이라면, 눈물의 소모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테니까.

 

_ 장연정 「휴가에 관한 몇 개의 말풍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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